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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리튬 캐는 엑손, 태양광·풍력 나선 셸·BP…'석유공룡'들의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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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차 회의론' 엑손, 이제는 전기차 시대 준비

[편집자주] [넷제로 케이스스터디] 탄소중립은 정부의 정책, 기업, 시민사회 모두가 풀어가는 과제입니다. 많은 국가에서 탄소중립은 이미 '달성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한 논의를 지나 '어떻게 이행하느냐'의 논의로 진입한 상황입니다. 한국에 함의를 줄 수 있는 각 국가·기업·지역 사회의 사례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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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터=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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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대 석유기업 엑손모빌이 전기차 배터리 핵심 광물인 리튬 채굴 사업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유럽 오일 메이저들에 비해 에너지 전환 대응에 더뎠던 엑손모빌이 사업 다각화 폭을 넓힌 신호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우크라이나 전쟁 후 석유·가스 사업 수익이 늘어나고 IRA(인플레이션감축법) 도입 변수가 더해진 상황에서 오일 메이저들의 사업 전략에 이목이 쏠리는 가운데 나온 소식이기도 하다.


전기차 회의론 밝히던 엑손…이제는 전기차 시대 대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21일 소식통을 인용해 엑손모빌이 아칸소주에 위치한 12만 에이커(약 486㎢) 규모 리튬 광산 시추권을 광물 탐사 기업 갈바닉 에너지로부터 매입했다고 보도했다. 매입 금액은 약 1억 달러(약 1323억원)다. 갈바닉 에너지에 따르면 여기서 캐는 리튬은 5000만대의 전기차 배터리를 만들 수 있는 400만톤의 탄산리튬으로 가공될 수 있는 양이다.

WSJ는 엑손모빌이 광물 생산·추출 기술 실행 가능성 테스트를 위해 막대한 리튬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발판을 마련하고자 이번 인수를 결정했다고 전했다. 이 지역엔 리튬을 함유한 염수(鹽水)가 있다. 염수에서 리튬을 추출하려면 시추·배관·액체 처리 기술이 필요한데, 이 기술은 엑손모빌 같은 석유·가스 회사가 기존에 써 오던 기술과 유사하다. 한 관계자는 WSJ에 엑손모빌이 몇 달 안에 시추를 시작할 수 있으며 수익성이 입증되면 운영을 확장 할 수 있다고 전했다.

1억 달러는 엑손모빌이 지난해 번 순이익 557억달러에 비하면 미미한 액수다. WSJ도 이 소식을 보도하며 "석유와 가스가 수십 년 동안 필요할 거라 확신한다고 말한 엑손에게 중요한 전략적 변화는 아니"라 전했다. 그러나 전세계 오일 메이저 중 탈(脫) 화석연료 흐름에 가장 강력히 저항해 온 엑손모빌의 움직임이란 점에서 이 소식은 이목을 모은다. 현재 리튬 전체 수요의 대부분이 전기차 배터리 수요로, 엑손모빌이 리튬 채굴에 나섰다는 건 전기차 시대에 대비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어서다.

대런 우즈 엑손모빌 CEO는 2019년 '석유 및 가스 기후 이니셔티브'란 업계 회의에서 "결국 석탄에서 생산된 전력으로 충전되는 전기차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해 전기차 전환에 대한 의구심을 드러냈다. 그는 2020년 3월 투자설명회에서는 유럽계 오일 메이저들의 기후변화 대응 목표 발표를 "미인대회 같은 경쟁"이라 불렀다. 2016년엔 엑손모빌이 영국 정부의 전기차 확대 정책을 막기 위한 로비 활동을 벌였다는 문서가 그린피스를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그러던 엑손모빌도 최근엔 다른 방향의 메시지를 발신해 왔다. 우즈 CEO는 지난해 6월 미국 CNBC와의 인터뷰에서 2040년까지 전 세계에서 판매되는 모든 신형 승용차가 전기차가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며 "휘발유 판매 감소가 사업에 미칠 영향을 평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엑손모빌은 지난해 3월 제너럴모터스의 자율주행 자회사 크루즈를 이끌었던 댄 암만을 자사 저탄소 솔루션 대표로 임명하고 저탄소 사업 전략을 구체화했다. 석유산업에 수십 년간 종사해 온 자사 직원을 내부 승진시켜 온 엑손모빌의 인사 문화를 감안할 때 눈에 띄는 행보다.

암만 대표는 지난달 투자자 대상 에너지 전환 설명회에서 저탄소 사업이 "수천억 달러"의 가치가 될 수 있고 "세계가 넷제로에 접근함에 따라 오늘날 엑손모빌의 기본 사업 보다 더 커질 수 있다"고 했다. 엑손모빌은 2027년까지 석유 및 가스 생산을 매년 3%씩 늘릴 계획이다. 석유·가스 생산을 전반적으로 줄이겠다고 공표한 유럽 에너지 기업들의 저탄소 사업과는 여전히 차이가 있다. 대신 엑손모빌이 중점을 두는 분야는 탄소포집저장(CCS)과 수소 사업이다. 엑손모빌은 2027년까지 저탄소 기술 개발에 170억 달러를 지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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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에너지 기업들의 재생에너지 투자 비율




'석유 회사' 아니라 '에너지 기업'..간판 바꾼 유럽 오일 메이저들

엑손모빌이 석유·가스 사업 투자를 늘리며 CCS 기술 개발 중심으로 저탄소 이행에 나서고 있다면, 유럽계 석유 메이저들은 수년 전부터 풍력·태양광 사업을 늘리며 포트폴리오를 다각화 하는 전략을 택했다. 이런 추이는 2010년대 후반 확연해졌다. BP가 2017년 말 유럽 최대 태양광 개발업체 라이트소스의 지분 2억 달러를 매입, 태양광 발전에 6년 만에 복귀한 게 대표적이다. 비슷한 무렵 셸은 유럽 최대 전기차 충전소 업체인 네덜란드 뉴모션을 인수했다. 같은 해 노르웨이 국영 석유업체 스타토일(현 에퀴노르)은 세계 최초 부유식 풍력발전소 가동을 시작했다. 프랑스 토탈이 재생에너지 기업 에렌의 지분 23%를 2억3750만 유로에 인수한 것도 비슷한 시기다.

토탈은 2021년 사명을 토탈에너지로 바꾸며 석유 기업에서 종합 에너지 기업으로의 이미지 변화를 노렸다. 2030년 100GW의 재생에너지 용량 확보를 목표로 2021년 인도 아다니 그룹과 20억 달러 규모의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미국 재생에너지 개발사 클리어웨이 지분 50%를 인수했다. 개발이 승인됐거나 건설 중인 재생에너지 프로젝트는 42.5GW다. 영국에 본사를 둔 영국-네덜란드 기업 셸도 2030년과 2050년 판매하는 에너지의 탄소 집약도를 2016년에 비해 각각 20%, 100% 줄인다는 목표를 내놨다. BP는 지난해 기준 개발 중이거나 승인을 받는 재생에너지 프로젝트 사업이 26 GW 이상이다.

유럽 오일 메이저들의 변화는 '말'에서도 확인된다. 2009년에서 2020년 사이 오일 메이저들의 연례보고서를 분석한 연구(리·트렌처·아수카, 2022)*에 따르면 셸의 보고서에는 이 기간 '저탄소 에너지' 언급이 59개에서 503개로 증가했고, 재생가능(3→91개), 청정(9→82) 이란 표현도 급증했다. 2009년 셸의 회장이던 요르마 올릴라는 "전세계 에너지 수요 충족을 위해 더 많은 석유와 천연가스를 생산하겠다"고 했지만 2020년 같은 회사를 이끈 채드 홀리데이 회장은 "깨끗한 저탄소 세계로 이동하는데 필수적 역할을 수행하겠다"고 했다. BP 역시 2009년 CEO는 자사를 '석유회사'로 간주했지만, 2021년에는 '통합에너지 회사'로 부르며 에너지 전환을 옹호했다. 실제 투자가 '말'만큼 늘어났다고 보긴 어렵지만, 적어도 담화 수준에서는 10년간 확연한 변화가 생긴 것이다.

2016~2017년경 시작된 변화의 배경에는 기후변화 대응을 요구하는 투자자·소비자들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경제성이란 요인이 있었다. 이 무렵 전기차 시장의 성장이 가시화하기 시작했고, 유럽연합의 배출권 거래제와 각 국가별 탄소세가 화석연료 사업의 비용을 늘렸다. 석유·가스 보다 평균 수익률은 낮지만 안정성이 높은 재생에너지 사업이 유가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위험을 줄인다는 점도 부각됐다. 특히 2010년대 장기간의 저유가는 석유 기업 입장에게 재생에너지 사업을 늘릴 유인을 더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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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뛴 유가·IRA의 등장…복잡해진 셈법 속 에너지 전환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가스·석유값 급등은 오일 메이저들의 에너지 전환 흐름에 다시 변곡점을 만들었다. 석유가스 사업에서 막대한 수익을 올린 오일 메이저들이 전환을 늦추는 방향으로다. BP가 대표적이다. 지난 2월 BP는 2030년까지 자사의 석유·가스 생산을 2019년 대비 25% 줄일 거라 밝혔다. 2020년 밝힌 40% 감축 대비 줄어든 목표다. 업계에서 가장 야심 찬 계획을 세웠던 BP의 목표 변경은 오일 메이저들의 에너지 전환에 대한 의구심을 촉발시켰다.

셸 역시 올해 재생에너지 사업 확장 보다 수익성 제고에 초점을 두기로 했다. 지난해 재생에너지 투자액은 전년대비 47% 늘린 35억달러였지만 올해 투자 규모는 지난해 수준으로 유지한다. 블룸버그 통신이 입수한 문건에 따르면 지난 17일 사내 타운홀 미팅에서 스티브 힐 셸 에너지 수석부사장은 재생에너지 사업을 포함해 수익을 창출하지 못하는 사업을 축소하거나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쟁 여파에 지난해 역대 최대 수익을 거둔 석유 기업들이 이 수익을 에너지 전환에 재투자하지 않는데 대한 비판이 커지자 해당 에너지 기업들은 방향전환이 아닌 속도조절이라 주장한다. 버나드 루니 BP CEO는 이 포트폴리오 조정을 발표면서 전략의 변화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2030년까지 석유 및 가스에 80억 달러를 추가로 투자하는 동시에 바이오 연료·충전·재생 에너지·수소와 같은 전환 사업에도 80억 달러를 더 지출할 것이란 설명이다.

중장기적으로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재생에너지 사업이 오히려 확대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BP에서 수소 및 재생 에너지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안자 이사벨 도첸라트 부사장은 전쟁으로 에너지 안보에 대한 전 세계의 관심이 높아지며 수입 화석 연료의 대안으로 자국 내 재생에너지에 대한 투자가 확대돼 에너지 전환이 가속화될 수 있다고 예상했다.

대서양 건너편 미국 오일 메이저들에게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변수는 지난해 도입이 결정된 IRA다. 엑손모빌의 저탄소 전략을 이끄는 암만 대표는 지난달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에너지 전환이 성공하려면 경제적으로 실행가능해야 한다"며 자사의 CCS 프로젝트 등 저탄소 관련 사업 대부분이 "IRA에 의해 주도되는" 미국에서 이뤄질 거라 했다. 미국 걸프만에서 진행 중인 대규모 CCS 사업을 착수하는데 IRA 보조금이 핵심이었다는 의미다.

IRA는 배출된 온실가스 포집하고 영구적으로 저장하는 프로젝트에 대해 CO₂ 톤당 85달러의 보조금을 준다. FT는 이달 초 엑손모빌의 저탄소 이행을 다룬 별도의 기사에서 "IRA의 탄소 포집 및 저장과 수소에 대한 보조금이 없었다면 (엑손모빌의) 투자가 승인됐을 지 의문"이라며 "(엑손모빌이) 잠재적으로 IRA의 가장 큰 수혜자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IRA는 리튬을 포함한 주요 광물 생산 비용의 10 %에 대한 세금 공제도 제공한다.

*Li M, Trencher G, Asuka J (2022) BP, 셰브론, 엑손모빌 및 셸의 청정 에너지 주장: 담론, 행동 및 투자 간의 불일치.

https://doi.org/10.1371/journal.pone.0263596

권다희 기자 dawn27@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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