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에피쿠로스 공동체는 금욕주의자들 모임에 가까웠다. 그는 “하루에 음식을 장만하는 데 1므나(고대 귀금속 중량 단위)의 돈도 쓰지 않고 포도주 4분의 1리터만으로 만족하면서, 그나마 대부분은 물만 마시며” 지냈다. 지금으로 치자면 만원 정도로 하루를 꾸린 셈이다. 쾌락주의자인 에피쿠로스는 왜 그토록 검박하게 일상을 살았을까?
“욕구는 채울 수 있어도 탐욕은 만족시킬 방법이 없다.” 이 말은 에피쿠로스 공동체의 캐치프레이즈와도 같다. 우리는 배고플 때 먹고 졸릴 때 잔다. 이렇게 ‘욕구’를 채우며 고통을 잠재울 때 우리는 진짜 쾌락을 누린다. 그렇다면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싶고, 화려하고 좋은 곳에서 자고픈 바람은 어떨까? 이때부터의 즐거움은 되레 고통이 된다.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누려도 그 이상을 바라게 되는 탓이다. 고삐 풀린 욕망은 금세 ‘탐욕’이 되어 버린다. 더 좋은 것을 가진 이들에 대한 질투와 시기, 비교에서 오는 열등감으로 마음은 편안할 날이 없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함께 일상을 검소하게 꾸려나갔던 거다.
어느 시대에나 절제와 검약은 중요한 생활 덕목이었다. 아낄 줄 모르고 내키는 대로 사는 어린아이를 떠올려 보자. 아이가 과연 나중에 견실하게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욕망 다스리기’가 전통적인 교육에서 빠지지 않았던 이유다. 하지만 지금은 절약보다 소비가 미덕이 된 듯하다. 시장은 탐욕을 채우는 삶이 멋지다며 우리를 부추긴다. 하지만 더 많이 누릴수록 가슴이 되레 헛헛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에피쿠로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볼 일이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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