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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일사일언] 진정한 쾌락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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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쾌락주의자인 에피쿠로스의 삶은 윤택하지 않았다. 그는 아테네 바깥의 정원을 하나 사서 진정한 즐거움을 좇는 자들을 불러들였다. 이곳에는 노예에서 거리의 여인들까지 온갖 사람이 섞여 있었다. 일종의 ‘히피 공동체’였던 셈이다. 진정한 즐거움을 찾기 위해 세상의 아웃사이더들이 ‘쾌락의 정원’에 모였다고 하니, 야릇한 상상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에피쿠로스 공동체는 금욕주의자들 모임에 가까웠다. 그는 “하루에 음식을 장만하는 데 1므나(고대 귀금속 중량 단위)의 돈도 쓰지 않고 포도주 4분의 1리터만으로 만족하면서, 그나마 대부분은 물만 마시며” 지냈다. 지금으로 치자면 만원 정도로 하루를 꾸린 셈이다. 쾌락주의자인 에피쿠로스는 왜 그토록 검박하게 일상을 살았을까?

“욕구는 채울 수 있어도 탐욕은 만족시킬 방법이 없다.” 이 말은 에피쿠로스 공동체의 캐치프레이즈와도 같다. 우리는 배고플 때 먹고 졸릴 때 잔다. 이렇게 ‘욕구’를 채우며 고통을 잠재울 때 우리는 진짜 쾌락을 누린다. 그렇다면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싶고, 화려하고 좋은 곳에서 자고픈 바람은 어떨까? 이때부터의 즐거움은 되레 고통이 된다.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누려도 그 이상을 바라게 되는 탓이다. 고삐 풀린 욕망은 금세 ‘탐욕’이 되어 버린다. 더 좋은 것을 가진 이들에 대한 질투와 시기, 비교에서 오는 열등감으로 마음은 편안할 날이 없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함께 일상을 검소하게 꾸려나갔던 거다.

어느 시대에나 절제와 검약은 중요한 생활 덕목이었다. 아낄 줄 모르고 내키는 대로 사는 어린아이를 떠올려 보자. 아이가 과연 나중에 견실하게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욕망 다스리기’가 전통적인 교육에서 빠지지 않았던 이유다. 하지만 지금은 절약보다 소비가 미덕이 된 듯하다. 시장은 탐욕을 채우는 삶이 멋지다며 우리를 부추긴다. 하지만 더 많이 누릴수록 가슴이 되레 헛헛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에피쿠로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볼 일이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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