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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5·18 '꼬마 상주', 정신적 손해배상금 받는다... 유족들 국가 상대 승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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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국가, 800만~1억 원 배상해야"
피격 등 사망... 영정사진 주인공 포함
한국일보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숨진 조사천씨의 아들 천호(당시 만 5세)가 합동장례식에서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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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ㆍ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숨진 희생자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정신적 손해배상’ 소송에서 이겼다. 판결이 확정되면 피해보상금과 별도로 최대 1억 원의 배상금을 받게 된다.

29일 법조계에 따르면, 광주지법 민사14부(부장 나경)는 5ㆍ18 유공자와 유족 등 20명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최근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원고들이 청구한 금액의 50∼89%를 인정해, 확정 판결 시 최소 810만 원에서 많게는 1억 원을 수령할 수 있게 됐다.

이번 소송에는 고 박금희양, 전영진ㆍ차종성군, 정윤식ㆍ조사천씨 유족 등이 참여했다. 일부 원고는 국가폭력 피해자와 가족의 고통을 인정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의미에서 상징적 금액인 10만 원만 청구했다.

당시 전남여상 3학년에 다니던 박금희양은 1980년 5월 21일 “피가 부족해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차량 방송을 듣고 헌혈하고 돌아오다가 계엄군이 쏜 총탄에 복부와 머리를 맞고 사망했다. 전영진(대동고 3학년)군은 옛 전남도청 앞에서 민주화 시위에 참여했다가 머리에 총상을 입고 숨졌다. 그가 집을 나서기 이틀 전 어머니에게 “엄마, 조국이 나를 불러요”라고 말한 일화로 유명하다.

차종성(금호고 3학년)군은 1980년 5월 19일 무등경기장 인근에서 계엄군이 시민들을 구타하는 것을 목격하고 항의하다가 광주교도소로 끌려가 45일간 구금됐다. 그는 구타ㆍ고문 후유증에 시달린 끝에 1983년 3월 5일 생을 마감했다. 정윤식씨는 1980년 5월 27일까지 최후 항쟁에 참여했다가 상무대로 연행됐다. 102일간의 고문 후유증으로 1982년 2월 28일 23세 나이로 숨졌다.

계엄군의 시민 폭행에 분노해 시위에 참여한 조사천씨는 1980년 5월 21일 옛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 현장에서 사망했다. 만 5세 아들 천호씨가 합동장례식에서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든 모습을 촬영한 외신 사진이 독일 주간 슈피겔에 실리면서 5ㆍ18의 아픔을 대변하는 상징물이 됐다.

재판부는 “전두환 등 신군부가 헌법질서 파괴 범죄를 자행하며 저지른 반(反)인권적 행위로 위법성 정도가 중대하고, 고인과 가족들의 육체적ㆍ정신적 고통이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불법 행위의 중대성, 인권침해 행위 재발 방지 필요성, 피해자ㆍ유족의 고통, 43년간 배상이 지연된 점 등을 두루 고려해 각각 위자료를 정했다”고 설명했다.

5ㆍ18 유족들이 정신적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은 2년 전 열렸다. 당초 정부는 5ㆍ18 보상법으로 이미 보상받은 사람은 ‘재판상 화해’ 효력이 발생해 추가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2021년 5월 “5ㆍ18 피해 보상을 받았어도 정신적 손해는 별도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결정해 그해 말부터 소송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관련 소송을 낸 유공자와 유족은 1,000명이 넘는다.

정부는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권은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안에 행사해야 한다”며 소멸 시효가 끝났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진영 기자 wlsdud451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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