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9 (금)

헌혈 다녀오다 계엄군 총에 숨진 고등학생 유족, 정부 상대 ‘정신적 손해배상’ 승소

댓글 1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박금희·전영진·차종성·정윤식·조사천 열사 유족 등 300여명 소송

재판부 “신군부 반인권적 위법 행위 중대, 가족 육체·정신 고통 커”

경향신문

5·18 민주화운동 43주년 기념식이 열린 18일 광주 북구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추모객들이 참배를 하고 있다. 광주|권도현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헌혈에 나섰다가 계엄군의 총탄에 숨진 고등학생의 유족 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정신적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했다.

광주지법 민사14부(나경 부장판사)는 A씨 등 315명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고 29일 밝혔다. 재판부는 원고 청구 금액의 50%∼89%를 인정했다. 판결이 최종 확정되면 유족들은 최소 800만원에서 최대 1억원의 배상금을 받게 된다.

소송에는 고교생이거나 갓 스물을 넘긴 나이에 숨진 박금희양, 전영진군, 차종성군, 정윤식씨 가족과 다섯 살배기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난 조사천씨의 유족 등이 참여했다.

박금희양은 전남여상 3학년이던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이 쏜 총탄에 사망했다. 박양은 “피가 부족해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차량 방송을 듣고 헌혈을 하고 오던 중 버스 안에서 참변을 당했다.

전영진군은 대동고 3학년으로 재학 중이던 1980년 5월 21일 옛 전남도청 앞에서 열린 민주화 시위에 참여했다가 머리에 총상을 입고 숨졌다.

차종성군은 금호고 3학년이던 1980년 5월 19일 시민을 구타하는 계엄군에 항의했다가 광주교도소로 끌려갔다. 모진 고문을 당한 차군은 45일 만에 풀려났으나 후유증에 시달리다 1983년 3월 5일 숨을 거뒀다.

정윤식씨는 20세 나이로 옛 전남도청에서 시민군으로 항전하다 계엄군에 체포됐고, 고문 후유증으로 1982년 2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조사천씨(36)는 1980년 5월 21일 옛 전남도청 앞 시위에 참여했다가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숨졌다. 조씨의 장례식에는 당시 다섯 살배기 아들이 영정 사진을 들었는데, 이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 여러 언론에 실리면서 5·18의 상징이 됐다.

재판부는 “전두환 등 신군부가 헌법 질서 파괴 범죄를 자행하며 저지른 반인권적 행위로 위법성 정도가 중대하고, 고인과 가족들의 육체적·정신적 고통이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40년 이상 배상이 지연된 점 등을 두루 고려해 배상금을 정했다”고 판시했다.

정부는 5·18 보상법으로 이미 보상받은 사람은 ‘재판상 화해’ 효력이 발생해 더는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했지만, 헌법재판소는 정신적 손해를 고려하는 내용은 없었다며 2021년 5월 위헌 결정을 했다. 이후 5·18 유공자와 유족 1000여 명이 정신적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고귀한 기자 go@kyunghyang.com

▶ 삼성 27.7% LG 24.9%… 당신의 회사 성별 격차는?
▶ 뉴스 남들보다 깊게 보려면? 점선면을 구독하세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