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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학벌주의 종언은 신기루일까 [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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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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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 대상 교육에서 한 강사가 미국 IT분야 유명 기업인들의 특징이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제 학벌이 중요하지 않은 사회가 오고 있다'라고 강조하는 것을 들었다. 한국에서 대학의 수직적 서열화와 맞물려 특정 학교 출신자가 실제 사회에 기여한 것보다 더 많은 혜택을 보는 학벌주의 현상이 존재해 왔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인공지능의 획기적인 발전, 기후위기 등 인류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변화들을 마주하는 현실에서 과거 기준에 따른 대학 서열이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고, 학벌주의는 마땅히 과거의 유물로 사라져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다 보면, 과연 학벌이 중요하지 않은 사회가 오고 있는 것일까 의문이 든다. 학령기 인구는 줄어들었지만, 대학 입시를 향한 경쟁과 투자는 꺾일 줄을 모른다. 통계청이 발표한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학생 수 감소에도 불구하고 2022년 초중고등학교 재학생의 사교육비 총액은 약 26조 원으로 전년도에 비해 약 2조5,000억 원이 증가하였고, 1인당 사교육비도 전년 대비 11% 증가하였다고 한다. 영유아 대상 사교육은 통계조차 제대로 만들어지고 있지 않으나, 소위 '영어유치원'이라고 불리는 영유아 대상 영어학원이 2017년 474곳에서 2022년 811곳으로 5년 사이에 71%나 증가했으며, 절반 이상이 월 100만 원 이상의 교습비를 받고 있다고 한다. 한국교육개발원의 교육 여론조사에서는 자녀의 사교육비가 부담된다는 응답이 2001년 81.5%에서 2020년 94.3%로 증가하고 사교육을 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7.9%에서 1.9%로 감소하였다. 아동청소년 삶의 질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청소년의 삶의 만족도는 OECD국가 중 최하위이다. 과도한 사교육이 부모에게는 경제적 부담을, 아이들에게는 정서적 부담을 지우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학벌을 중시하는 추세가 개선되지 않고, 젊은 연령대에서 학벌을 중시하는 경향이 오히려 더 높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교육개발원의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20·30대는 40·50대에 비하여 대학 서열화가 앞으로 심화할 것이라고 전망하는 응답비율이 높고 이 비율은 10년 전 조사에 비하여 증가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급격한 학령인구 감소로 지역권 대학이 위태로워지는 것을 목격한 젊은 연령대에서 오히려 수도권, 일류대 중심의 경쟁이 심화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강화되는 학벌주의는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2022년 OECD에서 발간한 한국경제 보고서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와 교육 시스템의 문제점으로 인하여 한국의 청년들이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하여 격렬한 경쟁을 하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청년 취업률이 낮아지고 가정 꾸리기를 포기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노동시장이 서열화되고 차별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교육 역시 그 서열을 반영하고 있으며 경쟁은 식지 않는다. 많은 아이들과 부모들이 고통받고 있고, 자녀 갖기를 포기하는 청년세대가 늘어나지만 적절한 대책과 해결방안은 찾아보기 어렵다. 학벌이 중요하지 않은 사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사회와 대학의 서열화, 과도한 사교육에 대해 충분한 사회적 논의와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일보

김남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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