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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아이들 ‘오줌 마렵다’ 하면 망친 수업” 스타 강연자의 교실 제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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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생태동화작가 권오준씨

한겨레

권오준 작가가 인터뷰 사진을 찍고 있다. 김아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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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작가의 본업은 글쓰기이고 강연은 부업이다. 강연 요청이 쇄도하면서 강연이 본업이고 글쓰기가 부업처럼 되어버린 작가가 있다. 생태동화작가 권오준(61)씨는 유치원부터 초·중·고교 등 전국의 학교와 도서관에서 연간 300회 이상 강연을 하는 학교 강연계의 ‘스타’다. 주변 작가들과 출판사들이 그에게 인기 비결을 궁금해했다. 매달 엔진오일을 갈고 1년에 8만㎞를 달리며 강연을 하는 그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틈틈이 강연 노하우를 정리해 최근 <강연자를 위한 강연>(학교도서관저널)을 냈다. 지난 2일 경기 하남과 광주의 초등학교에서 강의를 마치고 달려온 권 작가를 성남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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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자를 위한 강연> 표지.


그는 “이 모든 것이 머리에 떨어진 이끼덩어리로부터 비롯됐다”며 “우연을 가장한 운명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13년 전 그가 지역 방송국에서 객원기자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집 근처 산을 오르고 있었다. 갑자기 머리 위로 시퍼런 이끼 한 뭉치가 떨어졌다. 깜짝 놀라서 하늘을 쳐다보니 밤나무 위에 새둥지가 있었다. 나뭇가지를 딛고 올라가보니 커다란 둥지 안에 새알이 4개 있었다. 근처에 몸을 숨기고 한참을 지켜보니 어미 새 호랑지빠귀가 둥지로 날아들었다. 어미 새가 날아오르다 둥지를 치는 바람에 둥지 재료인 이끼가 떨어진 것이었다. 이날부터 두 계절동안 하루에 10여시간씩 새를 관찰했다. 엄마 새, 아빠 새가 각각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아기 새는 어떻게 성장하는지, 이들이 어디에서 목욕을 하는지 등 새의 생태를 꿰뚫게 됐고 딱새, 박새 등 주변의 다른 새 10여종의 생태도 관찰하게 됐다.

관찰 결과를 책으로 냈다. <둠벙마을 되지빠귀 아이들>로 작가 데뷔를 한 뒤 <날아라, 삑삑아!> <꼬마물떼새는 용감해> 등 지금까지 총 29권의 생태동화와 그림책을 출간했다. 책을 내면서 아이들과 만나서 새와 생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데서도 그를 부르지 않았다. 자신이 살던 아파트 관리소장을 찾아가서 노인정으로 아이들을 불러주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부탁했다. 무작정 학교 교무실을 찾아가 무료 강연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하기도 했다. 빔 프로젝터를 갖추지 않은 곳에서는 새 영상을 보여주기 위해 40인치 중고 텔레비전까지 사서 들고 다녔지만 무료 강연의 기회도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어렵게 얻은 기회도 난관에 봉착한 일이 많았다. 청중에게 아무리 질문을 던져도 요지부동한 적도 있고, 영상에서 새 모습을 틀어주자 ‘무섭다’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아이들도 있고, 사전에 정보를 전달받지 못해서 청중의 대부분이 한국어를 못 알아듣는 다문화학생인 경우도 있었다. 그에게 이같은 돌발 상황은 강연의 순발력과 노하우를 쌓는 기회가 됐다.

아이들의 재미와 몰입을 위해서 새로운 체험활동과 놀이를 개발했다. 아이들과 함께 새 둥지도 만들고 망원경을 들고 탐조활동도 떠났다. 한번은 아이들과 빵을 구우면서 강연을 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에 제빵학원을 다닌 뒤 커다란 오븐 2대를 들고 다니며 강연을 하기도 했다. 소프라노, 피아니스트와 북콘서트를 열기도 했고, 판소리꾼들과 함께 열기도 했다. 그의 강연은 점점 진화해갔고 반응도 뜨거워졌다.

그 결과 “5년 전 티핑 포인트(임계점)가 왔다”고 한다. 갑자기 전화기에 불이 났고 하루에도 5∼6개의 강연 요청이 들어왔다. 교장이 다른 교장에게 추천하고 도서관 사서가 다른 사서에게 추천하고 한번 불렀던 곳에서 다시 부르면서 서서히 쌓아온 것들이 폭발한 것이다.

매년 학교·도서관 강연 300회

최근 강연 노하우 정리한 책도

방송 객원기자 일하다 생태 관심

생태동화 그림책 29권 출간

강연 하고 싶어 노인정 찾기도

앰프 등 음향 장비까지 직접 준비


“강연은 누군가 운명 바꿀 수 있어”

그에게 인기비결에 대해 물었다. “강연이 뭔가를 가르치고 지식을 전달하는 ‘티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강연은 티칭이 아니라 청중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거예요. 저는 아이들이 모두 다 한마디씩은 하도록 해요. 무선 마이크로 강연장을 누비면서 강연 시작 10분 안에 내성적인 아이, 위축된 아이, 발달장애 아이, 다문화 아이들을 찾아내서 꼭 입을 열게 만들고 박수를 받게 해요.” 그 덕분에 처음으로 다른 이들 앞에서 말을 해보는 아이도 생기고, 계속 연락하는 아이도 생겼다. 강연이 끝나고 아이들에게 가지 말라고 붙잡혀서 교실에서 ‘감금’ 당하는 일도 몇차례 겪었다.

아이들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강연을 지루해한다. 아이들은 지루하면 바로 생리작용이 나온다. 한명이 ‘오줌이 마렵다’고 손을 든다. 그러면 그 옆의 아이들도 ‘저도요’라고 말하면서 2∼3명이 화장실로 간다. 이들이 돌아오면 다른 한무리도 화장실로 빠져나간다. ‘오줌이 마렵다’는 말이 나오는 순간 강연은 ‘끝’이 났다고 봐야 한다.

그가 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음향 시스템’이다. 체육관, 시청각실, 교실 등 강연장의 종류와 규모에 따라서 최적의 음향시스템은 다른데, 학교는 예산이 부족하고 시설도 낙후하다. 그가 사이즈별 3종 앰프와 믹서기, 마이크 등을 항상 들고 다니는 이유다. “음향이 강연의 9할입니다. 강연자의 목숨과도 같죠. 음향이 해결되지 않으면 강연을 아무리 잘 해도 1할밖에 안 돼요.” 목소리도 잘 전달되지 않는 강연에 집중할 청중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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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준 작가. 김아리 객원기자


그의 강연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언젠가부터 북콘서트에서 가수와 함께 듀엣곡을 부르더니 올해부터는 피아노도 배웠다. 끝없이 새로운 걸 시도하는 비결을 묻자 그는 답했다. “제가 도전의 달디 단 열매를 따먹어 봤잖아요. 동화 출간부터 강연까지. 그러니 멈출 수가 없죠.”

그에게 강연은 “누군가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이란다. “아이들이 변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마중물 역할을 하는 게 최고의 보람이죠.” 그래서 일정만 맞으면 강연료도 따지지 않고 산간오지 어디든 달려간다. 그는 강연자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한번의 강연이 들어오면 누구나 최고의 강연자가 될 수 있어요. 그런데 한번의 강연이 안 들어와도 최고의 강연자가 될 수 있어요. 나처럼 노인정에서라도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본업도 잊지는 않았다. “<해리포터> 같은 생태동화 한편 쓰고 싶은 꿈이 있죠. 지금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틈틈이 쓰고 있어요.”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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