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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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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경수로 지원 제안에 놀란 美 갈루치 차관보..."초구에 들어온 커브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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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문서 2,306건 공개
북한, IAEA 사찰 거부 NPT 탈퇴 예고
이후 1차 북핵위기 막전막후
북미 회담으로 탈퇴 유보 이끌어냈지만
10년 후 결국 NPT 탈퇴
한국일보

외교부 전경.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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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과 보류, 그리고 다시 탈퇴까지 과정을 담은 1993년 비밀 외교문서가 29일 대거 공개됐다. 문서에는 북한의 NPT 탈퇴를 막으려는 한국 정보의 중·장기, 강·온 대응 시나리오는 물론, 세 차례 실무접촉 자리를 가졌던 북한과 미국간 치열한 수싸움이 담겼다. 외교부가 이날 공개한 비밀해제 문서는 총 2,306권, 37만여 쪽에 달했다.

3월 북한 NPT 탈퇴 예고, 한국 정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북한은 1993년 3월, 90일간 유예기간을 갖고 NPT 탈퇴 선언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한미 팀스프리트 합동군사연습 재개와 국제원자력기구(IAEA) 특별 사찰 압력에 대한 반발이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우리 정부는 유엔과 미국, 일본을 잇따라 접촉했다. 북한를 회유할 필요가 있었다. 중국과 러시아, 여기에 유럽 국가들까지 가릴 게 없었다. 이들에게 북한 설득에 힘써줄 것을 촉구했다. 경제 제재부터 주한미군 부분 사찰 등 북한 요구 사안의 일부 수용까지, 가능한 대응책 모두 검토에 들어갔다. 물론 '북한의 태도 변화의 조짐이 있을 경우'라는 조건이 대부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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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비밀해제된 정부의 1993년 북한 핵개발 대응 외교전략. 외교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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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미국과의 협상 고수… 갈루치 "경수로 제안 예상 못 해"


북한은 그러나 남북대화를 원하지 않았다. 미국과 직접 협상을 시도한 것이다. 미국 역시 북한 고위급 접촉을 "당분간 고려하지 않을 것"(3월 26일 한미외무장관회담)이라고 했지만, 중국의 권유로 입장을 선회했다. 미국에게도 중국은 필요한 존재였다.

그렇게 1차 북미 고위급 회담이 성사됐다. 미국 뉴욕에서 6월 2~11일 열흘 간 일정으로 열렸다. 미국은 로버트 갈루치 국무부 차관보, 북한은 강석주 외교부 제1부부장이 대표로 나섰다. 이들은 이듬해 제네바 합의까지 양국 협상을 이끌었다.

회담의 실타래는 6월 7일이 돼서야 풀렸다. 북한 측이 실무접촉에서 '북미 공동성명 채택'을 조건으로 한 '탈퇴 보류'를 통보한 것이다. 공동성명에는 한반도 통일을 위한 미국의 지원, 내정불간섭, 자위 경우를 제외한 무력 불행사, 남북 비핵화 공동선언 지지의 내용이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동성명은 나흘 뒤 채택됐다.

2차 북미 고위급 회담에서 드러난 '경수로'… 갈루치 "예상 못 했다"


2차 고위급 회담에서는 '경수로 지원' 문제가 처음 등장했다. 탈퇴 보류 결정이 이뤄진 지 한 달 만에 열린 2차 회담이었다. 회담을 마친 갈루치 차관보는 우리 측에 "초구에 들어온 커브볼처럼 예상치 못했다"고 전했다. 그는 북한의 경수로 제안이 '김일성의 구상'이라며 "현재 운용 중인 원자로, 건설 중인 원자로 및 핵무기 관련시설(재처리시설)을 모두 폐기할 용의"를 표했다고 주제네바 한국대사에게 설명했다. 한승주 외무장관에게는 "작지만 중요한 진전을 이룩했다"며 "경수로 문제는 하나의 중요한 돌파구로 기능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도 평가했다. 물론 북한의 핵 문제가 모두 해결된 건 아니었다.

김계관 '일괄타결안' 제안… 미국 "강석주, 입장 어려워지고 있어"


실제 2차 회담 이후에도 IAEA 사찰 등 핵 문제엔 진전이 없었다. 하지만 10월 개리 애커먼 미국 하원 외무위 동아태 소위원장이 북한을 방문하면서 또다시 전환점이 생겼다.

애커먼 소위원장을 수행한 퀴노네스 담당관에게 평양 출발 직전 북한 김계관 외교부 순회대사(후일 6자회담 수석대표)가 '손으로 정리'한 메모를 전달했다. 거기엔 북측이 제시하는 '일괄타결 방안'이 담겨 있었다. 북한과 미국의 '톱-보텀' '보텀-업' 방법론이 충돌하게 되는 핵심 사안이다.

일괄타결안은 북한의 △NPT 영구 잔류 △특별사찰 포함 IAEA와의 완전한 협력 등과 미국의 △핵무기 등 무력 불사용 법적 보장을 포함한 평화협정 체결 △외교관계 완전 정상화 △남북한 균형정책 약속 등과의 교환안이 담겨 있었다.

한미, 북측에 팀스피릿 훈련 참관 제안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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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3년 3월 당시 청와대에서 북한의 NPT 탈퇴와 관련한 긴급 회의를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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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태도는 종잡을 수 없었다. 비핵화 협상에서 불리할 때마다 '유보 철회' 카드를 꺼내들었다. 한국 정부가 북한의 의도를 거듭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애커먼 소위원장이 방북 후 방한해 김영삼 대통령을 만난 '면담요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애커먼에게 "북한에는 핵무기가 없고, 제조 능력도 없으며, 핵무기를 제조할 이유나 동기도 없으며, 돈도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대통령은 "전적으로 거짓말"이라며 "위성촬영 등 여러 정보를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북한은) 핵무기를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한미는 1993년 11월 팀스피릿 한미 연합 군사훈련 때 중국과 러시아뿐만 아니라 북한을 초청하는 방안도 검토했다. 실제 정부는 남북 연락사무소를 통해 북측에 초청 의사를 밝혔다. 미국 국방 관련 학계에서는 북한이 유보 선언을 철회할 가능성을 고려해 북한의 핵개발 시나리오와 한반도에서의 분쟁 가능성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북한의 NPT 유보 선언은 1994년 10월 마련된 핵프로그램 동결 및 경수로 지원을 명시한 제네바 합의로 이어졌지만, 북한은 2003년 1월 NPT를 탈퇴했다.

문재연 기자 munj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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