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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룰만큼 이뤘다" 천상 떠난 재야의 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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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장기표 원장이 지난해 5월 4일 서울 여의도에서 매일경제와 인터뷰하고 있다. 한주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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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재야(在野)'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이 22일 별세했다. 향년 78세. 장 원장은 담낭암 말기로 입원 중이던 경기 고양시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이날 오전 1시 35분께 숨을 거뒀다. 장 원장은 지난 7월 17일 페이스북에 친구·지지자에게 쓴 편지를 올리며 담낭암 말기 진단 사실을 공개한 후 병원에 입원했다.

장 원장은 당시 편지를 통해 "당혹스럽긴 했지만 살 만큼 살았고, 할 만큼 했으며, 또 이룰 만큼 이루었으니 아무 미련 없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며 "자연의 순환질서, 곧 자연의 이법에 따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해온 사람이기에 자연의 이법에 따른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이야기했다.

양극화와 팬덤정치에 대한 걱정도 털어놓았다. 장 원장은 "과도한 양극화, 위화감과 패배의식, 높은 물가와 과다한 부채, 온갖 사건사고로 고통을 겪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도 문제지만 '앞으로 더 살기 어려운 나라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엄습해온다"며 "이를 극복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할 정치는 '무지의 광란'이라 불러 마땅할 팬덤정치가 횡행해 나라가 망하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든다"고 했다. 그는 "물극즉반(物極則反·극에 도달하면 원위치로 돌아온다)의 세상 이치처럼 이를 극복할 대반전이 일어나길 기대할 뿐"이라고 했다.

학생·노동·재야민주화운동 등 온몸으로 투쟁해온 그의 삶은 그 자체가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됐다. 1945년 경남 밀양시 상남면에서 태어나 1966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고 조영래 변호사와 만나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서울대 법대 학생회장이 돼 박정희 삼선개헌 반대운동을 주도하다 군 입대 후 베트남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제대 후 복학해서도 민주화운동을 이어갔고 당시 김근태·조영래와 함께 '서울대 운동권 3총사'로 불렸다.

1970년 11월 전태일 분신자결 소식을 접하고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에게 서울대 학생장으로 장례를 치르겠다고 제의한 후 실제로 서울대에서 전태일의 학생장을 치렀다. 이 여사와는 한동안 서울 도봉구 쌍문동 같은 동네에 살며 노동운동을 도운 것으로 알려졌으며, 2011년 이 여사가 쓰러지기 전 가족을 제외하고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이 장 원장이었다고 한다. 장 원장은 전태일 열사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해당 자료를 조영래 변호사에게 전달해 '전태일평전'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고용노동부는 이날 김문수 고용부 장관이 장 원장에게 민주주의 발전 공로로 추서된 국민훈장 모란장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장 원장은 1972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을 시작으로 1970~1980년대에 수차례 복역하기도 했다. 9년의 투옥과 12년의 수배생활에도 그는 "국민 된 도리, 지식인의 도리로서 할 일을 한 것일 뿐"이라며 민주화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았고 배상금도 일절 받지 않았다.

장 원장은 재야운동의 한계를 느껴 1989년 민중당 창당에 앞장서면서 진보정당 운동을 시작해 개혁신당, 한국사회민주당 등을 창당했다. 이후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총 7차례 선거에서 모두 떨어졌다. 21대 총선에서는 보수정당(미래통합당) 후보로 옮겨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대통령 선거에도 세 차례 출마를 선언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제도권 정치 진출에 결국 성공하지 못해 '영원한 재야'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최근에는 국회의원 특권 폐지 운동에 집중했다. 그는 지난해 4월부터 특권폐지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로 일하며 "국회의원의 월급은 400만원 정도면 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서동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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