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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 (일)

[씨네멘터리] 이 시대의 사랑법, 대도시의 사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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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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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는다고 좋은 영화가 아니듯이, 좋은 영화라고 해서 기억에 남는 영화는 아닙니다. 좋은 영화에는 다양한 정의(定義)가 있겠죠. 작품성이나 흥행 여부와 관계없이 내 인생에 그냥 눌어붙어있는 것 같은 영화는 좋은 영화일까요 아닐까요.

오랜만에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1987)를 다시 보았습니다. 한때 충무로의 기린아였던 고(故) 이규형 감독의 두 번째 영화로, 개봉 당시 서울에서만 관객 26만 명을 동원하며 그 해 흥행 1위에 올랐습니다. 요즘 나오는 코믹 청춘 로맨스 영화의 원조라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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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에서 미미와 철수 / 단성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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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스케치”의 주인공은 1987년 한 해에만 모두 여섯 편 영화를 개봉시키며 그 중 “씨받이”로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최초의 월드스타’ 고(故) 강수연(미미)과 당시엔 신인급이었던 박중훈(철수)입니다.

개봉 당시에는 재미있게 봤는데, 세월이 흘러 다시 보니 유치하게 느껴지는 구석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미미와 철수의 시시콜콜한 연애담 속에서 80년대의 대학가 풍경과 가치관을 추억하고, 당시 그들이 타고 다니던 시내버스 노선을 찾아보는 잔재미가 있었습니다.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가 보여줬던 청춘 로맨스물의 원형(原型)은 2000년대 들어 “엽기적인 그녀”(2001)로 이어집니다. 농구팀 주장에게 거침없이 따귀를 올려 붙이던 미미처럼, 낯선 남자에게 초면부터 거리낌없이 반말을 내뱉는 ‘그녀’ 전지현은 이 영화로 일약 톱스타의 반열에 올랐죠. “할레루야”(1997)에서 가짜목사 박중훈에게 두들겨 맞던 단역으로 영화계에 데뷔했던 차태현 역시 이 영화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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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적인 그녀"에서 그녀와 견우 / 신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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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적인 그녀”도 어느 정도는 전형적인 줄거리의 대학생 연애스토리일 뿐이지만 ‘왈가닥’ 수준인 미미를 뛰어넘는 ‘엽기적인’ ‘그녀’ 캐릭터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렸습니다. ‘그녀’는 남친에게 시도 때도 없이 주먹을 날리는가 하면, 불의부도덕을 보면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참지 않고 할 말을 하는 스타일입니다.

버스가 젊은이들의 주요 교통 수단로 등장했던 “청춘스케치”와 달리 “엽기적인 그녀”에는 지하철이 주 교통 수단이자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미미와 철수는 집전화와 공중 전화로 연락을 주고 받는데, 그녀와 견우는 피처폰으로 통화하며 시대의 변천을 알립니다.

특히 “엽기적인 그녀”는 당시 ‘국민가수’로 불리던 신승훈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I Believe’로도 유명하죠. “청춘스케치”에는 산울림의 김창완이 부른 ‘안녕’이라는 곡과 손현희(‘이름없는 새’로 제4회 강변가요제 대상 수상)가 노래한 ‘오늘은 어떤 일이’가 중요한 씬에 배경 음악으로 등장했습니다.
* * *


“엽기적인 그녀” 이후 또 20년이 흘렀습니다. ‘2020년대의 청춘스케치’ 또는 ‘이 시대의 엽기적인 그녀’라고 할 만한 영화가 한 편 나왔습니다. 이틀 뒤 개봉하는 김고은·노상현 주연의 “대도시의 사랑법”입니다. 국제부커상 후보에 올랐던 박상영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합니다. 시대의 변화를 알리듯 제목부터 은근히 현대적이고, 은근히 냉정하며, 은근히 세련된 분위기를 풍깁니다.

“청춘스케치”와 “엽기적인 그녀”의 공식처럼 “대도시의 사랑법” 역시 여성 톱스타와 신인급 남성 배우의 조합입니다. “파묘”로 ‘천만 배우’ 대열에 합류했던 ‘컨버스가 어울리는 여자’ 김고은은 “대도시의 사랑법”에서도 빨간색 컨버스를 신고 나옵니다. (컨버스 공식 모델인가 싶을 정도인데, 우연의 일치랍니다. 빨간색 컨버스는 이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상징으로 쓰이니 잘 봐두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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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의 사랑법"의 재희(김고은)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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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연기하는 대학생 재희 역시 앞 영화들처럼 ‘센캐’입니다. 남의 시선과 소문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쉬는 시간이면 대놓고 담배를 뻑뻑 피우고, 미친듯이 술마시고, 미친듯이 춤추고, 미친듯이 사랑하는 자·타칭 ‘미친 년’이죠. (하지만 속은 여려보이기도 하는 복잡한 캐릭터입니다. 단순하고 순수하게 살기 힘들다는 점, 이 점이 바로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과거의 청년들과 다른 점인 것도 같습니다. 사실은 재희가 미친 년이 아니라 세상이 미친 건 아닐까요)

남자 주인공 흥수 역은 “파친코”에서 선자의 남편 ‘이삭’ 역으로 주목 받고 있는 노상현이 맡아 꽤나 독특한 매력을 발산합니다. 무엇보다 흥수라는 캐릭터는 우리 사회의 소.수.자.입니다. 청춘 로맨스 영화인데 남자 주인공이 동성애자,라는 설정이 가능한 시대입니다.

‘자유로운 영혼’인 재희와 ‘심리적 히키코모리’ 흥수는 몸과 마음을 섞기 위해서가 아니라 편리함과 효율성을 추구하기 위해, 소수자로서의 우정에 기반한 동거에 들어갑니다. 20대 초반에는 미미·철수, 그녀·견우처럼 ‘먹고대학생’이던 두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서 졸업 후 닥쳐 올 ‘현실’을 걱정하며 취업과 미래 준비에 들어갑니다.

“청춘스케치”에서 미미나 철수는 장래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고, “엽기적인 그녀”에서 견우는 “장래 희망이요? 아직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저는 먹고대학생입니다”라고 대놓고 얘기하지만, 재희와 흥수는 빡세게 논만큼 빡세게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이 시대 청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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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의 사랑법"에서 흥수와 재희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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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센 여자’가 주인공이라는 점에서는 세 편 모두 똑같습니다. 하지만 “영어 단어라고는 LOVE와 SEX밖에 모른다”는 영문학도 미미도 결국에는 남들과 똑같이 의사 남편 만나서 귀부인이 되는 걸 꿈꾸면서 선을 보고,

“견우야! 미안해. 난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어쩔 수 없는 여자인가봐”하며 선을 보는 ‘그녀’와 달리,

“대도시의 사랑법”의 재희는 지하철에서 자신과 같은 복장을 한 여성을 보고, 아니 다른 사람과 똑같은 복장을 한 자신을 보고 부끄러워 가방을 내려 구두를 가립니다. 학창 시절의 재희는 자신이 게이임을 감추려는 동거 친구 흥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네가 너인 게 어떻게 약점이 될 수 있어?”

재희가 못참는 대상은 엽기적인 ‘그녀’처럼 불의부도덕이 아니라 편견갑질, 혐오입니다. 어렵게 취업했지만 결코 고분고분하지 않은 재희는 직장 회식 자리 끝에 쏘아붙입니다.

“왜 사소한 것에 목숨거냐고 하지말고 그냥 쟤한테는 그게 목숨같나보다 하세요.”
* * *


“대도시의 사랑법”의 음악은 힙합 뮤지션인 프라이머리가 맡았습니다. 이것도 시대의 변화라면 변화겠죠?

영화 “파묘” 개봉 직전 인터뷰 때 장재현 감독은 김고은을 무당 역에 캐스팅한 이유에 대해 제게 이렇게 설명했었습니다. “김고은 배우가 젊은 에너지이기도 한 반면에 베테랑 배우예요. 다양한 장르도 많이 해봤고. 저는 김고은 배우가 지금이 최고 전성기라고 생각해요.”

그 말을 상기시키듯,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김고은은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는 재희를 동시에 소화할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배우처럼 느껴집니다. 이처럼 사랑스럽고 판타지에나 존재할 것 같으면서도 현실감을 주는 연기라니요. 동성애자 흥수 역의 노상현도 “파친코”에서 보여줬던 다정하면서도 강단있는 캐릭터가 그냥 탄생한 것임이 아님을 증명해 보입니다.

주인공들은 미친듯이 먹고 마시고 춤추는데, 왠지 다소 뻔하고 답답한 느낌을 주는 영화 초반을 넘기면 코미디와 드라마가 잘 조화된 연출과 이 시대 MZ들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듯한 대사가 어우러진 웰메이드 코믹 청춘 로맨스 영화가 펼쳐집니다.

마냥 가볍기만한 로맨틱 코미디는 아닙니다. 이 시대에 ‘대도시’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진 수많은 소수자들의 초상을, 특히 청춘의 초상을 다룬 영화입니다.

세월이 좀 흐른 뒤에는 “대도시의 사랑법”이 80년대 “청춘스케치”와 2000년대 “엽기적인 그녀”의 명맥을 이어 2020년대를 규정하는 청춘 로맨스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봅니다. 그때쯤이면 이 영화가 누군가의 인생에 눌어붙은 ‘좋은 영화’가 되어있을지도 모르겠군요.

(※ 아래로 스크롤하면 씨네멘터리 칼럼을 구독할 수 있습니다)

이주형 논설위원 joole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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