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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토)

이슈 시위와 파업

해외서 시위 겪어보니…불편함 뛰어넘는 연대감을 느꼈다 [왜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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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소속 장애인 활동가가 2022년 4월21일 오전 서울 경복궁역에서 3호선 열차에 올라 탑승시위를 벌이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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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주 | 기업과인권리소스센터 한국대표·연구원



미국 유학 시절,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 시험 기간이었다. 도서관의 거대한 조명이 떨릴 정도의 소란에 깜짝 놀라 뛰어나가 보니, 피켓을 든 학생들이 복도를 발 디딜 틈 없이 채우고 구호를 외치며 경비들과 대치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꽤 큰 사건이었던 터라 한동안 학교에선 그 시위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됐는데, 와중 나는 내내 의아했다. 왜 아무도 “시험 기간에 시끄럽게”라는 얘길 안 하지?



이후로도 여러 나라에서 지내며 다양한 집회·시위 현장을 경험하게 되었다. 지난해엔 이스라엘에 있었는데, 거의 매주 입법 찬반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졌다. 시위 날이면 모든 대중교통이 마비되는 바람에 정류장에서 기약 없이 버스를 기다리며 사람들과 몇 시간씩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신기했던 것은 그때 만난 사람들도 시위의 취지나 관련 정치 상황에 대해선 핏대를 세우면서도 그 끔찍한 교통마비 상황에 대해선 딱히 누군가를 비난하지 않는 것이었다.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퇴근길 반전 시위대 행진과 노선이 겹쳐 별안간 버스에서 내려 빗속에서 30분 넘게 걸어야 했던 영국 런던에서도, 안 그래도 조용한 건물 곳곳에 국가시험 기간이라며 정숙 표지를 붙여놓고는 비를 피하려는 시위대에 로비를 내어 주던 독일 베를린의 한 대학에서도 뜻밖의 불편에 손해 본 듯한 기분을 느끼는 건 나뿐인 것 같았다. “시위 때문에 불편하지 않느냐”는 나의 질문에 누군가 “뭐 어쩌겠어, 시위가 그런 거지”라고 대답했다. 비가 오니 젖는 거지 어쩌겠어, 비 오지 말라고 할 순 없잖아? 이런 투였다.



생각해 보면 “시위를 하는 건 좋은데, 왜 ‘선량한 시민’한테 피해를 주냐고!”하는 나의 볼멘소리는 애초에 불합리하다. ‘시위’의 사전적 정의가 바로 공동의 목적을 위해 사람들이 오가는 장소에서 행진 등으로 위력과 기세를 보여 불특정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지 않은가. 그리고 이러한 불편함을 통한 목소리 내기를 존중하고 보장하는 것이, 또 그 불편을 관계 당국이나 위정자뿐만 아니라 모든 구성원이 기꺼이 나누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인 것이다. 내가 해외에서 만난 사람들이 이런 생각으로 시위에 관대했던 건지는 모르겠으나, 누구의 권리도 ‘희생’당하지 않는 그 분위기 속에서 나는 불편함을 뛰어넘은 연대감을 느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활동과 일련의 논란들을 돌아본다. 전장연의 지하철 직접행동은 내가 경험했던 다른 나라에서의 집회·시위와 견주면 순한 편에 속했지만, 훨씬 광범위하고 날카로운 반응을 보았던 사태기도 했다. 휠체어와 경찰이 씨름하는 횡단보도를 가로지르던 승용차에서 쏟아지던 욕설, 열차가 지연되던 역사에서 흘러나오던 “불법” “방해” 같은 단어들, 가타부타를 논하던 기사와 사설이며 수많은 인터넷의 댓글들은 말할 것도 없다.



무엇이 우리 사회를 이토록 시민행동에 무감각하고 소수자에게 가혹하게 만든 것일까? 시위의 취지와 요청 내용엔 공감한다면서도, 시위로 인한 마땅한 불편함은 용납하지 못한다는 우리는, 어쩌다 민주주의적 가치의 상실보다 출근길 잠깐의 지체를 견딜 수 없게 된 걸까?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이 치열하고 팍팍한, 뭐든 빠르고 효율적이어야 하는 한국인의 삶 탓일까?



약자의 목소리 내기를 민폐로 취급하는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괜찮을 리가 없다. 네가 힘든 건 알겠지만 내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는 사람은 자신의 괴로움에도 그렇게 가혹할지도 모른다. 공공의 공간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하는, 심지어 핍박당하는 소수자를 보며 모두는 각자가 언젠가 경험할 취약하고 억울한 그때 사회가 우리를 어떻게 대할지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지하철 직접행동, 그리고 또 다른 소수자들의 절박한 목소리 내기는 계속될 것이다. 그 시위를 어느 외국인이 보게 된다면, 그가 느낄 우리 사회의 정서는 무엇일까. 소란에 예민하고 공감에 가혹한 ‘민폐’와 ‘눈치’ 문화, 멈춤을 용납하지 않는 효율 중독, 이런 것들일까. 그게 아니라 경제 발전만큼이나 성공한 민주주의 정신, 긴 역사를 통해 지켜낸 한국의 정, 이런 것들일 수는 없을까. 비가 내려 불편할 일상보다 그 비를 맞고 자라날 꽃과 열매를 상상하듯 집회를 상냥하게 응원하며 바라볼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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