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7년 재조사 뒤 정비된 서봉총 남분 일대의 모습. 재조사 당시 드러난 호석과 남쪽 제단의 흔적을 온전히 살렸다. 남분 유적 뒤로 거대 고분인 서봉황대의 봉분이 보인다. 이달 초 찍은 사진이다. 노형석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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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10월10일 일본 방문 중이던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브 아돌프는 일본 당국의 권유로 신라 고도 경주로 향했다. 경주역사 기관차고에 들어갈 흙을 파내다 파괴된 비운의 고분 발굴 현장으로 달려갔다. 거기서 일제 고고학자들이 막 발굴한, 세 마리 봉황 장식을 나뭇가지 위에 붙인 우아한 황금관을 들어 올리며 탄성을 내질렀다.
무덤 이름은 스웨덴의 한자 표기 ‘서전’과 금관에 장식된 ‘봉황’에서 한 글자씩 따서 ‘서봉총’이라 붙여졌다. 오늘날 가장 유명한 신라 무덤들 가운데 하나인 서봉총 북분이다. 이 무덤이 세계적인 화제를 모으자 1929년 영국인 귀족 데이비드 퍼시벌이 사비로 자금을 대 서봉총에 바짝 붙은 작은 무덤(남분)을 발굴했으나 가는 고리 귀걸이 몇점과 토기편이 나온 것 외엔 별다른 성과 없이 물러났다. 이 무덤은 그 뒤로 이른바 ‘데이비드총’이란 명칭으로 불리게 된다.
1924년 10월 서봉총 북분 조사 현장에서 스웨덴의 구스타브 아돌프 황태자가 부장품을 살펴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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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신라 황금문화의 보고인데도 서구인들 이름이 붙었고, 정작 발굴한 일본인들은 보고서도 내지 않은 이 비운의 두 무덤 주인공을 둘러싼 베일이 이제야 벗겨지기 시작했다. 2016~18년 국립박물관은 100년 만에 재조사를 벌여, 서봉총은 큰 북쪽 봉분(북분)과 작은 남쪽 봉분(속칭 데이비드총·남분)이 맞닿은 독특한 ‘연접분’이며, 수직적 위계를 지닌 친족 간 무덤으로 추정된다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북분을 왕비, 남분을 자식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단서를 꺼내며 논의의 물꼬를 튼 것이다.
뒤이어 최근엔 1500여년 전 ‘마립간’ 칭호를 달았던 신라군주 소지왕(479~500)의 정실 왕비 선혜 부인 또는 후실인 벽화 부인, 그들의 자식이 묻힌 무덤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와 학계에 파장을 던지고 있다. 이는 정수진 국립중앙박물관 고고역사부 학예사가 지난 19일 신라사학회 연구발표회에서 ‘서봉총 축조 연대와 피장자 검토’란 논고를 발표하면서 처음 제기됐다.
1926년 스웨덴 황태자가 발굴 과정에 참여해 세계적 화제를 모았던 경주 서봉총 출토 금관. 여느 금관과 달리 나뭇가지 모양의 금관장식 끝에 세마리의 봉황새가 조형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논고를 보면, 4세기~6세기 초 경주 신라 고분들은 큰 왕릉급 봉분을 중심으로 곳곳에 각각 무리 지어 분포하는데, 서봉총과 부근 고분들도 동 세대 친족관계를 지닌 최상위층 집단묘역군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전제다. 봉황장식 금관, 굵은 고리 귀걸이 등 당대 귀족여성이 착장한 고급 유물을 쏟아낸 북분과 달리, 남분은 남성이 착용했던 가는 고리 귀걸이 말고는 빈약해, 자식 또는 하위층 남성이 묻혔으리란 추정이 제기돼왔다.
정 학예사는 서봉총에 가장 가까운 대형 고분 서봉황대가 마립간 시대 전성기를 이룬 소지왕(479~500)의 무덤임을 전제로, 서봉총 주인으로 소지왕의 정비 선혜 부인을 먼저 지목했다. 하지만 그는 자식이 없고 ‘삼국유사’엔 궁궐 거문고집 안에서 중과 사통하다 처형당했다고 기록된 ‘궁주(宮主)’일 공산이 크다는 게 통설이다. 과연 사후 호화부장품과 함께 최고의전을 받으며 묻혔을지 의문이 생긴다.
2017년 국립박물관이 재조사를 벌일 당시 드러난 서봉총 북분 매장주체부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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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고에서 또 다른 주인으로 꼽은 건 소지왕의 후처인 벽화 부인. 경북 영주(날이군) 유지의 딸로 현지 시찰하던 소지왕이 반해 몰래 궁에 불러들여 후비가 됐다. 자식을 낳았다고 ‘삼국유사’에 전해져 북분이 그의 것이면 남분은 자식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왕이 숨졌을 당시 벽화는 불과 16살. 북분을 쌓은 6세기 초 숨졌다고 짚기엔 나이가 너무 적다. 북분과 남분을 쌓은 시기도 서로 가까워 그와 자식이 갑자기 잇따라 숨져야 배경을 설명할 수 있다. 정식 왕비도 아니어서 북분 최고 부장품에 걸맞은 신분도 아니다.
서봉총 북분에서 나온 금제 굵은 고리 귀걸이. 굵은 고리 귀걸이는 통상 여성의 무덤에서만 나오는 고급 장신구여서 북분을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하는 근거가 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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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면 캘수록 알쏭달쏭한 두 신라여인의 무덤 주인공 찾기다. 지난 세기 초 스웨덴 황태자 발굴로 세상에 알려진 서봉총은 21세기에 100년만의 재발굴조사에 이어 다시금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는 중이다.
신라 대형고분의 주인공 찾기는 오는 30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리는 금령총학술대회(심포지엄)에서도 이슈로 떠오를 듯하다. 말 탄 사람을 빚은 상형토기와 작은 금관이 나온 것으로 유명한 금령총의 최근 재발굴조사와 학술연구 결과를 정리한 이 심포지엄에서는 이현태 학예사의 논고가 주목된다. 금령총이 소지왕의 부친 자비왕의 무덤으로 유력시되는 봉황대와 이사지왕이란 미지의 왕족 이름 새겨진 칼이 나온 금관총에 바로 인접해있다는 점을 들어 무덤주인을 자비왕의 손자이자 이사지왕의 아들로 추정하는 내용을 발표할 예정이어서 학계에 또 다른 논란을 촉발할 것으로 보인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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