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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이슈 미술의 세계

신과 초자연, 인간을 잇는 현대 미술가의 영상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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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고대 그리스 신화와 이집트 문명의 접점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 가면 영상극 ‘나는 새로운 신전의 찬가’(2023)의 한 장면. 폼페이의 옛 고대 로마 시설물 공간에서 가면을 쓴 노령의 화자가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진흙에 물을 섞어 인류 최초의 여성 판도라를 만들어낸 사연을 이야기하는 모습이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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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신화 속 갖가지 이야기들이 화면에 쏟아진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현대미술 대가 와엘 샤키(샤우키·53)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장면 장면들을 생생한 컬러 영상극 무대로 끄집어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 헤라를 비롯한 신들과 영웅, 인간들이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율동하고 노래하며 고함치고 소곤거린다. 뜻밖에도 베수비오스 화산이 멀리 보이는 이탈리아 고대 도시 폼페이의 폐허가 된 로마시대 건물들의 내부와 그 사이 광장과 도로, 그리고 벌판이 배경이 된다. 극의 줄거리는 하나로 집약되어 간다. 최고의 고대 문명 이집트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그 곡절 어린 드라마는 그리스 신화 최고의 제왕신 제우스가 부인 헤라신의 신전 여제사장이던 여인 이오를 탐해 밀회를 즐기다 헤라에게 들키는 데서 비롯된다. 제우스는 그를 암소로 변하게 해 피신시키지만 헤라가 보낸 쇠파리에게 쫓기며 이오니아해와 보스포루스해협, 그리고 소아시아를 지나 마침내 이집트 땅에 이르는 고달픈 피신의 행로를 이오는 거쳐야 했다. 이집트 땅에서 제우스는 헤라의 저주를 풀어내고 이오의 온전한 몸을 되찾게 해주고 마침내 그와 동침해 송아지 모양의 아들을 낳게 되니 이름을 ‘에파포스’라고 짓는다. 이집트인들은 그를 황소 아피스 또는 오시리스라 부르며 왕으로 숭배하니 그리스 신화에서는 이 사건이 바로 이집트의 기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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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영상극 ‘나는 새로운 신전의 찬가’(2023)의 영상 스크린 맞은편에는 출연 배우들이 썼던 각양각색의 고대 그리스풍 세라믹 가면들이 설치작품이 되어 단을 지은 채 전시돼 있다. 모두 작가가 만든 것으로 4~6㎏의 육중한 무게를 지녔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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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고대 그리스 신화와 이집트 문명의 접점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 가면 영상극 ‘나는 새로운 신전의 찬가’(2023)는 대구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와엘 샤키 개인전의 핵심 작품이다. 극중 등장하며 작가가 직접 만든 육중한 수제 가면들이 설치작품처럼 관객석 뒤쪽에 펼쳐져 선보이는 가운데 관객 앞에 펼쳐지는 50여분의 그리스 신화 재현 영상은 인물들의 선명하고 교묘한 색조와 배치, 율동 등으로 눈과 귀를 빨아들인다.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진흙에 물을 섞어 인류 최초의 여성 판도라를 만들어낸 사연을 이야기하는 광경과 타락한 인간들이 웅웅 소리를 내며 제전을 벌이거나 종종 뛰는 모습, 불안과 공포에 질린 얼굴로 올림포스 신의 분노와 징벌을 지켜보는 군상들은 장엄하고 아름다운 미감 속에서 잊지 못할 감동을 안겨준다. 이집트와 미국을 오가며 미술과 영상, 연극 등 다양한 예술 장르를 공부한 샤키는 영상, 페인팅, 드로잉, 조각을 총체적으로 구현하는 몇 안 되는 작가다. 아랍과 이집트의 역사를 다룬 부조와 오페라 형식의 작업, 십자군 전쟁 이야기를 마리오네트 인형극으로 풀어내는 작업들이 세계 미술계에 큰 반향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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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신화와 이집트 문명의 접점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 가면 영상극 ‘나는 새로운 신전의 찬가’(2023)의 한 장면. 타락한 인간들에 대한 신의 분노와 징벌을 지켜보는 군상들의 모습이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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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되는 건 그가 항상 주류가 아닌 타자의 시선에서 역사를 담는다는 점이다. 십자군 전쟁을 담은 마리오네트 극도 아랍인들의 시선에 초점을 두었고, 대구미술관의 그리스 신화 영상극 또한 그리스 신화의 맥락에서 이집트 탄생의 장면들을 연출했다. 그리스 문명의 후예인 로마 문명의 폐허가 된 도시에서 이집트 탄생에 얽힌 신화의 장면들을 선보이면서 ‘낯설게 보기’ 같은 연극의 소격효과를 극대화했다. 지중해를 배경으로 같은 문명사를 공유한 사람들이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을 드라마로 만들며 역사에 대한 기억을 시각적으로 공유하려는 시도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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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 공주’와 ‘금도끼, 은도끼’, ‘토끼의 재판’ 같은 이 땅의 구전설화와 전래동화를 색상이 반전된 화면에서 판소리와 전통탈춤의 무대로 옮겨낸 와엘 샤키의 신작 영상극 ‘러브스토리’가 미술관 공간에서 상영되고 있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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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 들머리에서는 ‘누에 공주’와 ‘금도끼, 은도끼’, ‘토끼의 재판’ 같은 이 땅의 구전설화와 전래동화를 색상이 반전된 화면에서 판소리와 전통탈춤의 무대로 옮겨낸 샤키의 신작 영상극 ‘러브스토리’가 상영되고 있다. 역시 그리스 신화극 같은 제3자의 시각으로 샤키 특유의 형식미학을 띤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년 미만의 짧은 작업 기간 때문에 판소리와 탈춤, 우리 전래동화 특유의 의미와 형식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하고 형식적인 실험성에만 치중한 측면이 보인다는 게 아쉽다. 내년 2월23일까지.



대구/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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