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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이슈 미술의 세계

숙련이 빚어낸 결론 ‘파인’[언어의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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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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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분이 울적하면 모자 가게에 가곤 했다. 다양한 모자들이 늘어져 있는 가게에서 얼굴을 반쯤 가릴 법한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몇 개 쓰고 벗다 보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고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토록 나를 쉽게 바꿀 수 있다니. 가을이 오면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줄 털모자들을 하나씩 꺼내 썼다. 빨간색으로 염색하는 건 두렵지만, 빨간 털모자를 쓰는 일은 두렵지 않다. 파란색으로 염색하는 건 큰 결심이 필요하지만 보송보송한 파란 앙고라 모자를 쓰는 건 신이 난다. 모자 하나만 덮어쓰면 나는 금세 다른 분위기를 갖는다.

언어도 모자를 쓰면 금세 다른 뜻을 지닌다. 본질은 놔두면서 말의 결을 바꾸는 단어의 힘 덕분이다. 성능의 시대에는 ‘울트라 화이트닝 크림’, ‘초강력 세제’처럼 성능의 강력함을 강조하는 언어를 주로 얹었다. 가치의 시대에는 ‘럭셔리 리조트’, ‘프리미엄 서비스’처럼 부가가치를 강조하는 언어가 흥했다. 오가닉, 에코, 그린 등 다양한 언어가 사회의 흐름과 시대의 수요에 맞춰 쓰이고 잊히곤 했다.

한때 ‘감성’은 모두가 쓰고 싶어하는 단어였다. 감성 카페, 감성 소품숍, 감성 캠핑까지, ‘감성’을 붙이면 새로운 분위기가, 신선한 매력이 덧입혀졌다. 남다른 분위기를 지닌 카페, 자기만의 정취가 있는 카페를 ‘감성 카페’라 불렀다. ‘감성’은 누구나 탐내는 언어. 참 많은 장소와 행위가 그 언어와 함께했다. 그러나 본질은 없고 어설픈 외향으로 분위기를 흉내 내는 사례가 많아지자 ‘감성’은 종종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단어는 아무나 쓸 수 없어서 자신의 격을 계속 유지한다. 질 높은, 정교함, 섬세함과 같은 뜻을 지닌 ‘파인(fine)’이 그렇다. <흑백요리사>의 인기와 함께 다시금 주목받는 ‘파인 다이닝’, 비실용적 순수 미술을 뜻하는 ‘파인 아트’, 장인의 섬세한 세공 기술로 천연 보석을 가공한 ‘파인 주얼리’에 사용되는 ‘파인’은 쉽게 사용되지 않는다. 파인을 동반하려면 분위기가 아닌 태도가 필요하다. 정성을 다하는 열의, 누구보다 정교하게 살펴보겠다는 각오 그리고 무엇보다 대상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파인’에 다 담겨 있다. 그래서인지 이 단어는 낡지도, 녹슬지 않고, 시대에 뒤처지지도 않는다.

파인은 단순히 비싼 가격이나 우월함을 주장하는 단어가 아니다. 품질, 장인정신, 세련된 미학을 구현하기 위해서 동원된 수많은 경험과 숙련, 실수와 고통이 빚어낸 아름다운 결론이다. 그중 무엇 하나만 탁월해서 만들어지는 경지가 아니라, 그 모든 과정이 두루 충만할 때만 도달할 수 있는 격이다.

사람들에게 감탄과 감동을 자아내는 ‘파인’이란 수식어를 부끄럼 없이 사용하려면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한 치열한 수고. 그 수고로움이 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태도를 가르쳐 준다. 내 일에 ‘파인’을 붙여도 될 정도로 정성을 들이고 있는지, 내 일을 순수하게 사랑하고 있는지를 돌이켜 보게 한다. 이건 잠깐 쓰고 벗는 모자가 아니라, 내 몸 전체가 익혀야만 가능한 근육. 잠깐의 기분 전환이 아닌 고통 뒤에 얻어진 근본적인 도약. 그 도약을 위해 나는 어렵고 좁은 길을 가보기를 소망한다. 나도 모르게 자동으로 흘러나오는 그 문장을 자신 있게 외쳐보기 위해서. ‘I’m fine thank you and you?’



경향신문

▲정유라
2015년부터 빅데이터로 라이프스타일과 트렌드를 분석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넥스트밸류>(공저), <말의 트렌드>(2022)를 썼다.


정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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