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3 (토)

더 못난 세상을 선택할 수 있다는 슬픔의 힘으로 [.txt]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분노의 포도 존 스타인벡 지음, 김승욱 옮김, 민음사(2008)


가차없는 정리해고의 달인이 수장인 정부효율부, 기후위기는 없고 화석연료를 더 많이 생산하도록 노력하겠다는 석유 재벌이 수장인 국가에너지회의, 17살 여성과의 성관계로 논란을 빚은 사람이 수장인 법무부…. 트럼프 행정부를 채우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 위험해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낀다. 196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존 스타인벡이 알고 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 위험해지는지.



소설 ‘분노의 포도’는 감옥에 갇혀 있던 톰 조드가 가석방이 되어서 고향 집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은행에 의해 평생을 살아온 땅에서 쫓겨난 톰 가족은 덜덜거리는 싸구려 차를 타고 먹을 것과 일자리를 찾아 캘리포니아로 고난에 찬 여정을 시작한다. 악조건 속에서도 다른 사람이 존엄을 잃지 않게 지켜주려는 이 가족의 노력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나는 혹시 톰과 엄마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까 떨면서 책을 읽었다. 그리고 자본의 탐욕, 악함에 대한 존 스타인벡의 분노와 슬픔이 인간의 심장처럼 펄떡거리는 것을 느꼈다.



존 스타인벡은 인간이 머리와 가슴으로 만들 수 있는 최악의 세상과 최선의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그 두 세상을 보여줄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나는 그가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이 아니라 더 못한 세상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에 깊은 슬픔을 느꼈고 이 현실이 아니라 다른 현실을 선택할 힘을 가지길 바랐기 때문에 ‘분노의 포도’를 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의 첫 부분에 거북이가 나온다. 땅거북은 둑을 기어오르고 있다. 힘겹게 앞으로 나가려고 애쓰는 거북이의 앞다리를 야생 귀리 줄기가 휘감고 있었다. 마침내 거북은 둑에 올랐지만 차 한 대가 다가왔다. 운전자는 거북을 보고 운전대를 급히 꺾었다. 다음번에는 소형트럭이 다가왔다. “운전사는 거북을 보고 운전대를 꺾었지만 거북을 치고 말았다. 앞바퀴가 등딱지 가장자리와 부딪히는 바람에 거북은 순식간에 뒤집어져 동전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고속도로 밖으로 굴러갔다.” “하늘을 향해 드러누운 거북은 오랫동안 등딱지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녀석의 다리가 흔들흔들 밖으로 나와 몸을 뒤집기 위해 짚을 만한 것을 찾았다. 거북은 앞발로 석영 조각을 움켜쥐고 조금씩 등딱지를 뒤집어 똑바로 섰다. 야생 귀리 줄기가 녀석의 다리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창끝처럼 생긴 씨앗 세 개가 땅에 박혔다. 거북이 둑을 기어 내려가는 동안 등딱지에 끌려온 흙이 씨앗을 덮었다. 거북은 흙길로 들어서서 움찔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 장면은 힘이 있다. 땅이 쩍쩍 갈라지고 말라가는데도 야생 귀리가 땅에 박혔고 거북이는 계속 앞으로 가기 때문에 새로운 이야기의 씨앗이 어디선가 자라고 있는 것만 같다. 트럼프 당선 혹은 그간의 숱한 노력이 뒷걸음치는 일들을 겪으면서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사람들, 어린아이에게 ‘벌거벗은 임금님’을 읽어주는 부모들, 기후위기 해결에 열정을 기울인 사람들, 여성들, 성소수자들의 비어버린 가슴에 슬픔과 분노, 사랑으로 빚어진 야생의 향기 풍기는 이야기의 씨앗이 자라길 바란다.



정혜윤 시비에스(CBS) 피디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책방, 한겨레에서 만나자 [세모책]

▶▶핫뉴스, ‘한겨레 텔레그램 뉴스봇’과 함께!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