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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1 (일)

환절기와 백일잔치 [달곰한 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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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욕설과 외계어가 날뛰는 세상. 두런두런 이야기하듯 곱고 바른 우리말을 알리려 합니다. 우리말 이야기에서 따뜻한 위로를 받는 행복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한국일보

단풍나무에 첫눈이 소복이 쌓였다. 가을 눈치만 보던 겨울이 큰 걸음을 내디뎠다. 이제 가을과 작별해야겠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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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100은 많은 뜻을 안고 있다. 평가에선 가장 뛰어남을, 시간으론 오랜 세월을 상징한다. 100은 흠이나 모자람 없는 완전함을 뜻하기도 한다. 나이로 100세는 장수를 의미한다. "백 살까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라는 인사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아기가 태어나 100일째 되는 날엔 잔치를 연다. 백일잔치다. 부모는 100일 동안 아기가 탈 없이 잘 자라줘서 하뭇하다. 몸 푼 지 100일 된 아기의 엄마도 잔치의 주인공이다.

백일을 축하하는 잔칫상엔 뽀얀 쌀가루로 쪄낸 백설기가 빠지지 않는다. 백설기의 백(白)은 하얗고 깨끗함을 뜻하는 한자어다. 설기, 흰무리, 흰무리떡이다. 부모는 아이가 때 묻지 않고 바르고 건강하게 백 살까지 살기를 바라며 상에 백설기를 올린다. 또 100명의 친척, 이웃과 떡을 나눠 먹어야 바람이 이뤄진다고 믿어 넉넉히 떡을 돌렸다. 백일 떡엔 나누고 베푸는 마음도 달곰하게 섞여 있다.

지금은 백일잔치 소식이 드물지만 예전엔 여기저기서 많이 열렸다. 의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100일은 삶과 죽음의 경계였기 때문이다. 아기가 100일을 살아내려면 환절기를 잘 보내야 한다. 오래전 그땐 환절기를 못 넘기고 별이 된 아기가 많았다. 백일잔치에 축하와 축복의 말들이 넘실거리는 까닭이다.

환절기는 계절이 바뀌는 시기다. 변절기와 같은 말이다. 계절은 딱 정해진 날, 다음 계절에 자리를 내주진 않는다. 서로 데면데면 지내다 어느 순간 앞선 계절이 떠난다. 얼굴만 빼꼼히 내밀고 있던 겨울이 밤새 힘을 냈나 보다. 온통 눈 세상이다. 단풍나무에도 은행나무에도 감나무에도 눈이 소복이 올라앉았다. 가을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간절기’라는 말도 옷, 여행, 건강 관련해 많이 들린다. 말 그대로 절기(節氣)의 사이(間)다. 시나브로 바뀌는 계절 사이에 정해진 기간이 따로 있을까.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쓰지 않는 단어다. 환절기, 변절기만으로도 충분하니 간절기는 버리는 게 좋겠다.

주말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막 소파에 앉았는데 누군가 찾아왔다. "위층에 사는 젊은 내외 엄마"라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백설기를 내민다. 손녀가 백일이라서 떡을 돌린단다. 가족과 둘러앉아 떡을 먹는데 '아차' 싶었다. 백일 떡은 맨입으로 먹지 말랬는데! 부랴부랴 봉투를 들고 올라가니 할머니 품에서 아기가 방글방글 웃고 있다. 사랑스러운 아기 덕에 이웃과 정을 나누니 참 좋다. 이웃과 떡 나눠 먹을 일이 많아지길 바라본다.

한국일보

노경아 교열팀장 jsjys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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