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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토)

[朝鮮칼럼 장대익] 民意를 읽는 가장 게으른 방법, 여론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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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조사로 아이폰 만들었다면

더 큰 키패드·더 많은 버튼…

“사람들은 때로 뭘 원하는지 몰라”

포드·테슬라·애플의 혁신을 보라

여론조사의 맹신과 악용

민주주의를 병들게 할 뿐

지도자라면 숫자 좇지 말고

보이지 않는 방향성 읽어야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우리가 여론조사를 통해 아이폰을 만들려 했다면 더 큰 키패드와 더 많은 버튼을 원한다는 대답을 들었을 것이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시장조사나 여론조사를 매우 싫어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소비자를 무시해서가 아니었다. 정반대로, 혁신을 이끌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진짜 욕구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통찰 때문이었다. 그는 단순히 제품의 기능을 개선하는 데 그치지 않았고 사용자가 제품과 상호작용하는 모든 순간을 최적화하려 했다. 그는 “우리의 임무는 아직 페이지에 쓰이지 않은 것을 읽어내는 것”이라고 말하며, 고객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욕구를 발견하려 했다. 2007년 잡스의 손에는 모바일 터치스크린과 앱스토어가 장착된 아이폰이 들려 있었고 그 이후로 우리의 일상은 크게 바뀌었다. 아이폰, 아이패드, 맥북 등 애플의 혁신은 모두 이러한 철학에서 비롯되었다.

애플만이 아니다. 마차의 시대에 사람들에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물어봤다고 해보자. 그들의 대답은 틀림없이 “더 빠른 말!”이라고 했을 것이다. 포드의 창업자 헨리 포드는 고객의 대답이 아니라 고객의 욕구에 주목했고 자동차 대량생산의 길을 열었다. 고객은 자신의 문제와 해결 방법을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저 익숙한 틀 안에서 조금 더 나은 것을 요구할 뿐이다.

비슷한 예는 테슬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론 머스크는 전통적인 자동차 산업이 소비자들의 요구(더 좋은 연비나 더 큰 차)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을 때, 전기차와 자율주행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만약 그가 소비자들에게 “당신이 원하는 차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면, 아마 더 좋은 연비나 더 강력한 엔진이라는 답변을 주로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를 뛰어넘어 지속 가능성과 첨단 기술이라는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냈다.

다이슨 역시 마찬가지다. 날개 없는 선풍기나 무선 청소기는 소비자들이 직접 요구한 제품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이슨은 사람들이 선풍기 날개로 인해 발생하는 먼지와 안전 문제를 싫어한다는 점을 관찰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디자인의 제품을 개발했다. 다이슨의 성공은 고객의 숨겨진 불편함을 해결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구글 역시 독창적 방식으로 사용자의 만족을 이끌어냈다. 구글은 고객에게 직접 묻기보다는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고객의 필요를 파악하고 이를 기반으로 혁신적 서비스를 제공해왔다. 예컨대 구글 트렌드는 사람들이 검색하는 키워드를 분석해 현재와 미래의 트렌드를 예측한다. 감기 관련 키워드 검색량이 많아지면 그 동네의 감기 유행을 예측하는 식이다. 구글 애널리틱스 역시 웹사이트 방문자의 행동 데이터를 분석해 사용자가 어디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발견하고 개선점을 제안한다. 이제 웬만한 기업들은 설문조사나 포커스 그룹 인터뷰로는 고객의 진짜 욕구를 알아낼 수 없다는 사실에 대체로 동의한다.

혁신적 기업들의 이런 성공 스토리는 작금의 정치 상황과 리더십에 대해서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우리는 종종 여론조사를 통해 민의를 읽고자 하지만 최근 불거진 이른바 명태균 게이트는 여론조사의 맹신과 악용이 민주주의를 얼마나 병들게 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여론조사는 효율적이고 간편하다는 이유로 정치인들에게 과도한 사랑을 받고 있다. 숫자로 요약된 결과는 쉽게 이해되고 전략적으로 활용되기 좋다. 하지만 애플 등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여론조사는 순간적인 선호만을 반영할 뿐이며 국민의 깊은 가치관이나 장기적 비전은 담아내지 못한다. 가령, 높은 지지율은 승자 편승 효과를 통해 특정 후보에게 유리한 흐름을 형성하고, 낮은 지지율은 약자 동정 효과를 조장한다. 게다가 여론조사를 조작하거나 특정 결과를 유도하여 권력을 강화하려 한 이번 사건들은 여론조사가 민의의 반영이 아닌 정치 권력의 재생산 도구로 전락할 위험성을 경고한다.

진정한 리더십은 숫자를 넘어선 곳에서 시작된다. 잡스가 스마트폰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했듯이, 포드가 자동차라는 새로운 이동 수단을 제시했듯이, 구글이 데이터를 통해 보이지 않는 트렌드를 읽어냈듯이, 지도자들은 국민이 미처 표현하지 못한 필요와 욕구를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여론조사는 나침반일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항해를 완성할 수는 없다. 조금 더 냉정하게 말하면, 여론조사는 민의를 읽는 여러 방법 중 가장 손쉽고 게으른 방식이다. 지도자는 단순히 숫자를 좇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방향성을 읽어내야 한다. 더 빠른 말 대신 자동차를, 더 많은 버튼 대신 터치 스크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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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익 가천대 스타트업칼리지 석좌교수 진화학 및 과학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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