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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9 (금)

역사 왜곡의 원점, 정한론[장준영의 ‘지피지기’ 일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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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

◀쓰시마를 점거한 러시아 함선 [야후재팬 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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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론 반대를 내세우며 자결한 요코야마 야스타케 [아후재팬 화상]



‘나는 반대올시다’

“조선을 소국이라고 경멸하여 군대를 보내 침공하는 것은 외국에서 볼 때 수치스럽고 어리석은 짓이다. 당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나라의 기강을 바로세우고 천하에 믿음을 보이며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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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론자 우두머리 사이고 다카모리 [야후재팬 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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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 가고시마 출신의 28세 소장 개혁파 요코야마 야스타케는 1870년 8월, 조선침략을 주장하는 정한론을 규탄하는 내용과 메이지정부의 부패상을 고발하는 ‘시폐10개조’를 제출하고 정부청사 앞에서 자결을 결행한다. 이는 그 당시 일본에서 한창 기승을 부리던 정한론에 반대 입장을 표명한 최초의 사례였다. 그의 자결은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메이지정부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누구보다도 충격을 받은 인물은 정한론자의 우두머리 격이며 정권의 최고 실력자였던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요코야마는 “선생은 정부의 개가 되려는가. 도쿠가와 막부가 메이지 신정부로 바뀌었을 뿐, 악정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다”라며 사이고를 추궁했다. 그와 사이고는 구 사쓰마번(가고시마현) 시절 이래 맹우이자 메이지유신의 혁명 동지였기 때문에 그의 지적은 사이고에게 뼈아프게 다가왔다. 당초 무력을 통한 조선침공에 경도되었던 사이고는 그 이후 조선과의 수교 문제에서 대화 협상론자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 계기가 요코야마의 죽음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다.

1868년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고 천황 중심의 메이지 신정부가 들어서자 실력자로 등장한 신진 세력들은 호화 사치 방탕한 생활과 뇌물 수수 등의 부정부패 그리고 권력투쟁만을 일삼자 민심은 이반되고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나 정권은 위기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메이지 정부의 수뇌부는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민심의 불만을 외국으로 돌리려는 방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맨 먼저 등장한 논리가 ‘정한론’ 즉 조선 침략론이었다. 먼저 여기에는 논리적 근거와 명분이 필요했다. 이들은 일본 역사서 ‘고지키’(古事記)와 ‘니혼쇼키’(日本書記)에 나오는 진구(神功)황후가 신라 백제 고구려를 정벌했다는 ‘삼한 정벌설’과 ‘임나일본부설’을 제기했다. 그리고 ‘조선은 원래 일본의 속국이었다’는 쇼비니즘적인 일본 국학파의 주장과 복고주의 성향의 일본 전통종교 신도의 종교관을 결합했다. 이 논리를 주장한 학자로서 사쿠마 쇼잔, 야마다 호코쿠, 요시다 쇼인 등을 들 수 있다. 정한론의 ‘한’은 삼한의 ‘한’에서 유래됐다. 이로써 그동안 역사와 사상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정한론은 일본 대외정책의 근간으로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한일간 역사 왜곡의 원점이라 할 수 있는 정한론이 영향력을 발휘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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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론파와 대척점에 섰던 오쿠보 도시미치 [아후재팬 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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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화이질서’의 붕괴

19세기 중·후반 동아시아는 ‘화이질서’(중국 중심의 지배질서)의 붕괴를 맞이한다. 종주국 청은 1842년 영국과의 아편전쟁과 프랑스 러시아 미국도 가세한 1857년의 제2차 아편전쟁(애로호 사건)에서 연달아 패배하면서 체제의 취약성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여기에 치명타를 더한 게 태평천국의 난이었다. 내우외환이 겹친 것이다.

이틈을 타고 러시아는 1860년 베이징조약을 통해 청으로부터 연해주와 사할린을 획득, 일본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일본은 장래의 위협 세력으로 러시아를 상정하고 그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런 와중에 1861년 러시아 함대가 쓰시마를 6개월간 무단 점거하며 조차권을 요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일본을 지원하는 영국군 함대가 쓰시마에 출동하자 러시아 함대는 철수했다. 이때 일본은 러시아 함장으로부터 러시아가 쓰시마를 거점으로 삼아 장차 조선을 정복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된다. 일본은 조선이 러시아에 정복당하면 그 다음 차례는 일본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이런 러시아의 계획을 무산시키기 위해 조선과의 수교를 서둘러야 했다. 조선에 대한 기득권 확보는 일본 외교의 시급한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이런 포석 하에서 일본은 조선에게 메이지정부 시대의 개막을 통보하며 수교를 서두르는데 협상에 임하는 쇄국·양이론자 대원군의 입장은 완고했다. 일본이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구열강들과 국교를 맺은 것을 두고 “일본이 서양 오랑캐로 변했다”고 비난하면서 ‘일본인과 접촉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포고령을 내리는 등의 강경한 입장을 견지했다. 이는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 일본 정한론자들을 크게 자극하여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을 무력 정복하자는 목소리가 분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한론자들의 주장은 오쿠보 도시미치 등 내치 우선론자 측의 힘에 밀려 좌절되고 만다. 그러자 정권의 중추에 있으면서 정한론을 주장하던 세력들은 이에 대한 항의 표시로 일제히 관직을 사직했다.(‘메이지 6년 정변’) 이때 사이고도 함께 물러났다. 국론은 분열되고 정한론 지지자들은 사가의 난 등을 일으키며 국정은 파국의 위기로 내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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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론자는 물러났으나 정한론은 더 거세져

오쿠보 도시미치를 정점으로 하는 내치 우선론자들은 정국 주도권을 잡았지만 민심 이반은 심각했다. 그는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정치적 승부수를 던진다. 그것은 1874년의 ‘대만 침공’이었다. 몇 해 전 류큐(오키나와)의 선박이 항해 도중 폭풍우를 만나 대만에 난파하여 상륙하자 대만 원주민들은 류큐 표류민들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일본은 이를 문제 삼아 대만을 무력 침공하여 점령했다. 청나라 조정에서 항의가 빗발쳤다. 정한론자들은 이런 그의 행태를 두고 “내치를 우선시 한다면서 대만 무력 침공은 웬 말이냐”라며 맹렬하게 비난을 쏟아냈다. 메이지 유신 공신이자 정권 수뇌부인 기도 다카요시는 항의 표시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제 정권 중추에는 오쿠보만 남게 되었다. 비록 노선 투쟁에서 패배한 정한론자들은 물러났지만 대외 팽창·침략주의 시발점인 정한론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차세대 그룹인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 가오루 등이 이를 이어받아 그 영역을 조선반도에서 만주 시베리아 동남아시아 등지로 확장시켜 나갔다.

8년에 걸친 조선과의 수교 협상에 진척이 이뤄지지 않자 일본은 대만을 침공한 이듬해인 1875년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면서 조선을 무력 침공하여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체결, 조선 지배를 향한 교두보를 마련하게 된다. 그 이후 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잇달아 승리하면서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 그 여세를 몰아 시베리아 침공, 만주 점령, 중국대륙 침공, 동남아시아 침공 등 침략전쟁에서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공격으로 개시된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에 패배함으로써 군국주의 일본은 패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잘못된 역사관의 토양에서 번식하여 일본 대외침략의 시발점으로 작용한 정한론은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민족들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주며 오늘날까지 그 후유증은 이어지고 있다. 그 상처를 치유하는데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이점에서 일본과 일본인들은 150여 년 전에 요코야마 야스타케가 외친 ‘일본의 양심’을 깊이 되새겨야 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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