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역점사업과 특활비 삭감 등 예결위서 통과
與 “민생이 아닌 이재명 방탄용”
일러스트=이철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감액 예산안은 정부가 짠 원안에서 증액 없이 정치권 쟁점 예산만 삭감한 것으로, 야당 단독으로 이 같은 예산안이 예결위를 통과한 것은 헌정사상 처음이다. 국회가 예산을 늘리거나 새로운 예산 항목을 신설하려면 정부 동의를 받아야 하지만, 감액은 정부 동의 없이 가능하다. 민주당은 전날 감사원장 탄핵 추진에 이어 이날 감액 예산안 처리라는 초강수를 이어가고 있는데, 이재명 대표의 의중이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예결위는 여당 의원들이 퇴장한 가운데 정부가 짠 예산안 677조4000억원에서 4조1000억원을 감액한 673조3000억원의 감액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국민의힘은 “검찰·경찰·감사원 예산을 삭감해 그 기능을 무력화시켰다”며 “민생과 약자 보호를 내팽개친 이재명 대표 방탄용 예산안 단독 의결”이라고 했다. 민주당은 이날까지 예결위가 예산안을 통과시키지 못하면 정부 원안이 본회의에 자동부의 되기 때문에 감액 예산안을 처리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민주당은 예산안의 법정 처리 시한인 다음 달 2일 본회의에서 이날 예결위를 통과한 예산안을 처리하겠다고 했다. 다만 지역 예산 증액이 반영되지 않은 예산안에 대한 야당 지역구 의원의 반발도 예상돼 여야 간 막판 증감액 협상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
그래픽=송윤혜 |
29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야당이 단독으로 ‘감액 예산안’을 통과시킨 건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다. 그간 이런 일이 없었던 것은 야당 또한 예산 심의 과정에서 협상을 통해 본인들이 원하는 예산을 얻어 냈기 때문이다. 큰 틀에서 정부의 예산편성권을 존중하되, 각 정당의 정책을 실현할 예산을 배분하는 게 관례였다. 정치권 관계자는 “감액 예산안이란 건 정치의 실패”라며 “내가 무엇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남이 무엇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게 감액 예산안의 본질”이라고 했다.
실제 민주당은 ‘이재명표’ 지역화폐 예산 2조원 등을 포기하는 대신 정부 역점 사업들과 대통령실·검찰·경찰·감사원 등의 활동비를 대폭 깎았다. 이재명 대표를 수사했거나 민주당과 마찰이 잦았던 기관들의 손발을 묶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대통령비서실·국가안보실의 특수활동비(82억5100만원), 검찰 특정업무경비(506억9100만원)와 특활비(80억900만원)는 전액 삭감됐다. 이 중 마약 수사나 딥페이크 범죄 등 민생 범죄와 관련된 특경비도 전액 잘려나갔다. 검찰은 “특경비는 디지털 성범죄, 마약 범죄, 산업 재해 등 민생 침해 범죄 수사에서부터 벌금 미납자 검거 등 업무 전반에 사용되는 필수적인 비용”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선거 범죄’ 신고자에게 지급되는 포상금 예산도 일부 삭감됐다.
경찰 특활비(31억6000만원)와 감사원 특경비(45억원)·특활비(15억원)도 ‘0원’이 됐다. 전공의들의 복귀를 지원하는 예산은 3678억원에서 2747억원으로 깎였다. 정부 원안에 505억원으로 편성된 동해 심해 가스전(대왕고래 프로젝트) 예산은 8억원만 남았다. 우크라이나 공적개발원조(ODA) 예산도 반 토막 났다.
가장 많이 삭감된 예산은 정부가 비상시를 대비해서 쓸 수 있는 돈인 ‘예비비’다. 정부가 4조8000억원으로 편성했지만 민주당은 이를 2조4000억원으로 반 토막 냈다. 민주당은 올해 사용한 예비비가 1조5000억원가량인데 4조원 이상의 예비비는 과도하다고 했다. 정부는 “예비비의 대폭 삭감으로 재해·재난 등 예측하지 못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 즉시 대처하지 못하게 된다”고 반발했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전체 예산안을 통합적으로 조정한 게 아니기 때문에 한 부처에 예산이 반영된 사업과 밀접한 다른 부처 사업의 예산은 사라지는 오류 등이 발생할 우려가 크다”고 했다.
주한 프랑스 대사 접견 -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필립 베르투 주한 프랑스 대사와 면담하기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이덕훈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민주당은 지역화폐나 고교 무상 교육 등 이재명표 예산을 증액하지 못하더라도 피해는 정부와 여당이 더 클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 한 중진 의원은 “증액 예산은 지역구 의원들도 아쉽지만 더 애타는 게 지자체장”이라며 “현재 지자체장은 국민의힘 소속이 훨씬 많아 타격은 저쪽이 더 크다”고 했다. 민주당 지도부 관계자는 “의원들이야 지역구 예산도 확보를 못 하니 불만이겠지만, 이 대표가 감액 예산안으로 가자는 데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민주당 지도부는 특히 “특활비는 정부가 애원해도 예정대로 삭감하라”는 특명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민주당이 짠 감액 예산안이 바로 다음 달 2일 본회의에 오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여야 합의되지 않은 예산안을 바로 올리기는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여야 간 막판 증감액 협상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
☞감액 예산안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 원안에서 국회가 증액 없이 오로지 감액만 반영해 수정한 예산안. 증액 및 항목 신설에는 정부가 동의해야 하지만 감액에는 정부 동의가 필요 없다. 이 때문에 거대 야당이 정부·여당 반대에도 ‘감액 예산안’을 강행 처리하는 것이 가능하다. 헌정사에서 감액 예산안이 본회의까지 최종 통과된 적은 없다.
[김태준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