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자유’서 주요국 지도자 평가...“시진핑, 20세기 중 18세기 동안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었다 주장”
메르켈 전 총리는 이 책에서 재임기간 교류했던 버락 오바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등 각국 지도자에 대해 냉정하고 사실적으로 평가했습니다.
푸틴 대통령은 2007년 소치에서 만나 회담할 때 회담장에 자신이 무서워하는 개를 데리고 온 걸 언급하면서 “상대가 자신을 비하하는지 계속 지켜보면서 항상 다른 사람을 무시할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서는 “독일이 마치 그와 미국에 큰 빚이라고 진 것처럼 행동했다”면서 “공감대를 찾거나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유럽 내 대표적인 친중파 인사로 꼽히죠. 하지만 시진핑 주석과 중국에 대한 평가는 차가웠습니다. 메르켈 전 총리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시 주석과 근본적인 관점의 차이를 느꼈다”고 했어요.
◇“집단 위해 개인 자유 제한...가치관 달랐다”
메르켈 전 총리는 시 주석이 국가 부주석 겸 공산당 중앙당교 교장을 맡고 있던 2010년 그를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중국 방문 길에 당교에 들러 시 주석과 만나고, 학생들과 질의 응답하는 시간도 가졌다고 해요.
동독에서 자란 메르켈 전 총리는 시 주석과 회담하면서 중국 정치 체제와 공산당의 역할에 대해 여러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그 당시를 돌아본 메르켈 전 총리는 “사회의 어떤 집단이 모든 사람을 위한 최적의 길을 파악하고 결정할 수는 없으며, 이는 자유의 결핍으로 이어진다”면서 “이 점에서 시 주석과 가치관의 차이를 느꼈다”고 했어요.
반체제 인사에 대한 탄압과 인권 문제도 거론했습니다. 메르켈 전 총리는 중국 방문 당시 위험을 무릅쓰고 독일 대사관을 찾아온 반체제 인사를 만나고 개인적으로 이들을 돕기도 했지만, 중국의 조직적인 반체제 인사 탄압 자체를 바꿔놓을 수는 없었다고 했어요.
2010년 7월 중국 방문 당시 공산당 중앙당교를 방문한 앙겔라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 /중국신문망 |
◇기후변화, 투자협정 위해선 협력
이런 인식 차이에도 그는 경제와 기후변화를 중심으로 중국과 현실주의적인 외교를 했습니다. 16년간 재임 기간에 12차례나 중국을 방문해 후진타오, 시진핑 주석 등과 회담했어요. 화상 회담도 10차례나 됩니다. 중국 방문 때는 베이징 외에도 상하이, 난징, 시안, 청두, 선양 등 지방 도시도 찾았어요. 퇴임을 앞둔 2021년 10월13일 화상회담 당시 시 주석은 “메르켈 총리는 중국 국민의 오랜 친구”라면서 “정과 의리를 귀중하게 여기는 중국인은 오랜 친구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메르켈 전 총리는 2020년 유럽연합(EU)과 중국 간 포괄적 투자협정(CAI) 합의를 이끌어냈죠. 독일 기업들이 중국 시장에서 불공평한 대우를 받지 않고, 유럽 기업들이 드넓은 중국시장으로 쉽게 진출할 수 있게 하겠다는 취지였습니다.
또 기후 변화 대응을 위해 중국과 적극적으로 협력했어요. 퇴임할 당시 중국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31%를 차지할 정도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많았습니다. 메르켈 전 총리는 시 주석이 2020년 유엔에서 “2060년까지 탄소 제로를 달성하겠다”고 약속한 점을 거론하면서 “독일은 물론 전 세계에 좋은 일”이라고 했어요.
2021년10월13일 열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회상 회담. 시 주석이 퇴임을 앞둔 메르켈 총리에게 고별사를 하고 있다. /중국 CCTV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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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일로, 개도국 대중 의존도만 높여
회고록에는 시진핑 주석의 중국몽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메르켈 전 총리는 2013년 시 주석 취임 이후 모든 이슈에 대해서 토론할 기회를 가졌다고 해요. 당시 시 주석은 지난 2000년간의 인류 역사에 대해 얘기하면서 “20세기 중 18세기는 중국이 세계 경제와 문화의 중심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19세기 초부터 뒤처졌지만, 그전까지는 세계의 중심이었다는 거죠.
시 주석은 “역사적으로 정상 상태로 중국을 돌려놓아야 한다”면서 이것을 ‘중국몽’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2017년 트럼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은 과거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했다는 일이 생각나는 대목이죠.
중국몽을 내세운 중국의 공격적인 행보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습니다. 시 주석은 취임 초기부터 동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를 잇는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추진했죠. 시 주석은 이 프로젝트가 다자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프로젝트라고 설명했지만, 메르켈 전 총리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개발도상국에 대한 중국의 투자가 개도국의 대중 의존도만 높였고, 개도국 자신의 주도권을 크게 축소시켰다는 거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7년 4월7일(현지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팜비치의 마라라고 리조트에서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조선일보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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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국해서 국제법 무시하고 세력 확장
남중국해 전역에 구단선을 긋고 그 안에 있는 섬과 바다가 모두 중국 관할이라고 주장한 것도 비판했습니다. 2016년7월 국제상설중재재판소가 “중국의 구단선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판결을 했는데도 국제법을 무시하고 남중국해에서 계속 세력을 확장해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주변국의 반발을 불렀다는 거죠.
메르켈 전 총리는 이런 여러 사례를 언급하면서 중국 정치인들은 다자주의를 입에 달고 살지만 “그저 입으로 하는 말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입으로는 다자간 협력과 상호 이익을 거론하지만, 실제로는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거죠. 현실주의 정치인다운 냉정한 평가였습니다.
중국이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남중국해 남해구단선(빨간색 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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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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