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콜+] 중력을 거스르는 남자, 발레리노 김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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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SBS 문화예술전문기자가 전해드리는 문화예술과 사람 이야기.
발레 공연에서 그렇게 뜨거운 함성과 박수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지난달 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된 국립발레단의 '라 바야데르'.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무용수 김기민, 그리고 파리 오페라발레단 에투알('별'이라는 뜻으로 파리 오페라발레단 무용수 최고 등급) 박세은이 객원 주역으로 춤춘 무대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2010년 유니버설 발레단의 '라 바야데르'에서 함께 춤췄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국내에서 '주목받는 신인'이었던 두 사람은 이후 해외 발레단에 입단해 각각 정상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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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스키 발레단의 '까만 머리'
'라 바야데르' 공연이 없는 날 시간을 내준 김기민을 골라듣는뉴스룸 커튼콜에 초대했습니다. 박세은은 이미 커튼콜에 출연한 적이 있지만, 김기민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김기민은 일찍 마린스키 발레단에 입단했고 국내 활동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발레 팬들을 제외하면 낯설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TV 유명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는 등 국내에서도 인지도를 높여가고 있죠.
마린스키 발레단은 러시아 고전 발레의 본산으로 세계 최고 발레단 중 하나로 꼽히는 단체입니다. 김기민은 19살이었던 2011년, 마린스키 발레단에 동양인 발레리노로서는 처음으로 입단했습니다. 그의 한예종 지도교수였던 러시아인 스승 블라디미르 킴의 역할이 컸습니다. 마린스키 발레단 솔리스트 출신인 블라디미르 교수는 김기민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의 공연 영상을 마린스키 측에 보냈습니다. 마린스키 발레단은 보통 부속 발레학교인 바가노바 아카데미 졸업생만을 대상으로 단원을 뽑지만, 영상을 본 마린스키 측에서는 김기민을 위한 단독 오디션을 열었습니다.
심사위원들은 그의 기량에 감탄했지만 입단 결정이 내려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까만 머리 발레리노'라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바가노바를 졸업하고 마린스키에 입단해 오랫동안 마린스키의 유일한 외국인 단원이었고 솔리스트로 활약했던 한국인 발레리나 유지연은 2010년 퇴단했고, 김기민 입단 당시에는 동양인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입단 두 달 만에 주역으로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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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님이 인종차별을 해서 그런 게 아니라 '전례'가 없었으니까요. 반대로 생각하면 한국인이 300명 있는데 외국인 1명 뽑는 건데, 한국 무용에 금발의 서양 남자가 나오는 셈이죠. 재미있는 건, 저희 발레 선생님(블라디미르 킴)도 마린스키 주역 무용수 출신인데 고려인이시거든요. 선생님이 '나도 까만 머리 아니냐?' 했더니 '너는 좀 다르다. 생김새가 약간 서구적이기도 하고. 하지만 기민이는 100% 순수 동양인이다. 피부 톤도 그렇고, 머리 색도 그렇고" 하더라고요."
'까만 머리' 김기민은 오디션 사흘 만에 입단을 통보받았습니다. 전례를 깰 정도로 탁월한 기량이었던 거죠. 그리고 불과 두 달 만에 김기민은 '해적'의 주역을 맡았습니다. 파트너는 마린스키의 간판스타 중 한 명인 빅토리아 테레쉬키나. 그의 데뷔 무대는 대성공이었습니다. 김기민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무대에서 자신의 실력을 입증했고 2015년 마린스키의 수석무용수 자리에 올랐습니다. 2016년에는 무용계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 최고 남자무용수상을 받았습니다.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 고전 발레의 남성 주역은 왕자가 많습니다. 까만 머리 김기민은 이제 '마린스키의 왕자'입니다. 마린스키 수석무용수에게만 허락되는, 무용수 개인의 이름을 내걸고 하는 '리사이틀'을 두 번이나 했을 정도로 스타가 됐습니다.
김기민 이후 마린스키 발레단은 외국인들에게 조금 더 문호를 개방했습니다. 최근에는 발레계에서 '천재 소년'으로 유명했던 발레리노 전민철(20)의 입단도 결정되면서 화제가 됐죠. 김기민이 후배 전민철의 영상을 마린스키에 보여주면서 추천했던 건 물론입니다.
중력을 거스르는 남자, 점프의 비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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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민의 춤은 '중력을 거스르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마치 김기민 혼자 와이어를 달고 춤추는 것 같다는 반응도 있습니다. 그는 날아오르듯 높이 뛰어 오래 공중에 머무르고 가볍게 착지합니다. 어려운 동작도 너무나 가뿐하고 우아하게 해냅니다. 발레를 처음 보는 사람들도 김기민의 탁월한 테크닉에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라 바야데르'에서 전사 솔로르 역으로 출연한 그가 조금 뛰어오르기만 해도, 객석에선 환호성과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중력을 거슬러 날아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점프 동작의 비결이 있을까요?
"일단 점프는 타고나야 됩니다. 훈련해서 더 높이 뛸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발레는 그 훈련 말고도 할 게 너무 많잖아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보다 높게 뛰는 사람들 많습니다. 저는 점프 연습보다는 점프 전까지의 동작이나 점프 후의 동작을 조금 더 많이 신경 썼어요. 스피드 있게 떠서 조금 더 멀리 떨어져요. 그러니까 좀 더 높이 뛰는 것처럼 보이는 이펙트를 만드는 거죠."
"높이도 높이지만, 정말 가뿐하고 깔끔하게, 연기를 해치지 않으면서 하시니까,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느낌이 거기서 나오는 것 같기도 해요."
"그건 선생님 영향이 많았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라 바야데르의 솔로르는 전사이다 보니까 사람들이 다리 찢기도 하고 굉장한 테크닉을 많이 해요. 그러면 멋있어 보이거든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절대 하지 말라고 그러세요. 왜냐하면 이건 서정적인 발레라는 거죠. 작품마다 스타일에 맞는 테크닉이 있는 거고, 그 스타일을 강조하셨기 때문에 내용에 안 맞는 화려한 테크닉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발레는 종합예술... 작품 해석에 투자했다
김기민은 뛰어난 테크닉은 물론이고 등장인물의 심리와 감정을 잘 살려내는 연기로도 정평이 나 있습니다. 저는 김기민의 '라 바야데르'를 보면서 연기에 정말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요, 그가 춤을 추지 않고 있을 때조차 그의 연기에서 눈을 떼기 어려웠습니다. 마임 동작 하나하나에도 마음을 담아서 하는 게 역력했고 캐릭터의 감정이 오롯이 전달됐습니다.
'라 바야데르'의 솔로르는 현실적 제약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연인을 배신하는 '나쁜 남자'인데요, 김기민의 솔로르는 이 남자의 고뇌와 번민, 슬픔을 생생하게 드러냈습니다. 이건 단순히 점프 좋고 회전 잘하고 리프트 잘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김기민은 발레는 테크닉뿐만 아니라 기본기, 감정, 해석이 모두 중요한 '종합예술'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저는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게 재미있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테크닉이 뛰어난 건 알고 있거든요. 사실 마린스키에서 13년 동안 공부했던 거는 테크닉도 있지만, 조금 더 발레의 해석이나 감정, 스타일, 이런 것에 투자를 많이 했어요. 왜냐하면 한국에서 발레 배우면서 가장 아쉬웠던 게 공연을 많이 못 본 거였거든요. 저는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마린스키 가니까 이 친구들은 매일 공연을 본 친구들이었고, 저는 1년에 서너 번밖에 보지 않았으니까요. 정말 발레의 해석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어요."
연습은 연습실 밖에서도 이뤄진다
그는 자신이 발레에 안 맞는 체형이라고 합니다. 흔히 다리는 일자로 곧게 뻗어있고, 골반은 바깥쪽으로 돌아가 있으며, 무릎은 안쪽으로 들어가 있고, 발등이 튀어나오면 발레 하기에 좋은 체형이라고 하는데, 김기민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 '발레 그만두는 게 좋겠다'는 얘기도 수없이 들었던 그는 체형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지독하게 연습에 매달렸습니다.
그는 마린스키에서도 '연습벌레'로 유명했습니다. 김기민과 함께 춤춘 테레쉬키나는 그가 사흘이면 끝낼 동작을 한 달 동안 연습한다며 혀를 내두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김기민은 이제는 조금 달라졌다고 했습니다. 테크닉보다는 발레의 해석, 감정, 스타일에 더 많이 투자한다고 한 얘기와 통하는 것 같았습니다.
"예전에는 연습을 연습실에서 많이 했었고요. 지금은 연습을 좀 밖에서 많이 하는 편이에요. (밖에서 어떤 식으로 하시나요?) 생각을 좀 더 많이 하는 편이에요. 지금도 연습은 많이 하는데, 그것만 계속하다 보면 약간 로봇처럼 나오는 게 있더라고요. 자연스러움이 사라지고 인위적으로 보이고 딱딱해 보이고. 물론 실수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좀 더 인간적인 게 좋아요."
'자연스러운 게 좋다'는 마린스키 수석무용수의 하루 일과는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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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나 7시 반쯤 일어나요. 그러면 꼭 신문이든 책이든 뭐라도 읽어요. 제가 부족한 걸 알기 때문에 좀 더 채우려고, 많이 읽으려고 노력해요. 언어 공부도 꾸준히 하고요. 외국에 살고 있어도 이렇게 공부를 안 하면 실력이 내려가기 때문에. 그리고 아침에 루틴 운동을 하고 나서 강아지 산책을 30분 정도 시키죠. 그리고 발레단에 가면 오전 10시, 10시 반쯤 되죠. 그러면 클래스 하고 운동 하고 리허설 하고요."
공연이 있는 날은 하루 일과가 달라집니다. 늦게 일어나서 먹고, 유튜브도 보고, 책도 읽다가 다시 잡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공연하러 나갑니다. 이렇게 비축한 에너지를 모두 무대 위에 쏟아내고 돌아옵니다.
그도 흔들릴 때가 있다... '루틴'이 도움
김기민은 마린스키 발레단에 입단하자마자 주역으로 무대에 섰고, 입단 4년 만에 수석무용수가 됐습니다. 계속 승승장구하며 순탄한 길을 걸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과연 김기민에게도 슬럼프가 있었을까요? 그는 24살~25살 무렵에 발레를 그만둘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고 털어놨습니다.
"그때는 그냥 너무 힘들더라고요. 긍정적인 생각을 할 때도 있지만, 모든 게 다 좀 그럴 때 있잖아요. 모든 게 잘 안 되고, 부상도 되게 많고, 여자친구한테도 차이고 이럴 때 있잖아요. 그럴 때는 '슬럼프'라고 하기보다는 발레를 여기까지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생각하는 슬럼프는 그냥 그만둔다는 게 아니라, 하기 싫은데 하기는 해야 하는 이런 상태가 길게 가는 게 슬럼프 같아요."
"그럼 슬럼프는 루틴을 그냥 꾸준히 하면서 벗어나는 편이세요? 아님 뭔가 전환하는 다른 걸 만드는 편이세요?"
"루틴이 도움이 많이 돼요. 제가 만든 루틴이. 그러니까 이 운동을 1시간 하면 그냥 힘이 나요. 오늘 난 절대 하기 싫어, 이럴 때도 그 루틴을 하면 그다음 할 일을 하더라고요. 발레를 좋아서 하는 거긴 하지만 저도 항상 좋지만은 않아요. 힘들 때도 있어요, 그래도 제가 발레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해야 되니까 하는 거지, '나 지금 운동하는 거 너무 행복해! 막 근육이 찢어져! 행복해!' 이러면서 하지는 않습니다. 저도 힘들어요. (웃음)"
러시아엔 제2의 부모님, 원격 멘탈 케어는 형 담당
"그럼 발레를 그만두고 싶었던 그때는 어떻게 지나간 거예요?"
김기민은 형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에게는 같은 길을 걷는 발레리노 형 김기완이 있습니다. 김기민보다 세 살 위인 김기완은 현재 국립발레단의 수석무용수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한 집안에서 발레 스타를 두 명 배출한 거죠.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발레를 배웠고 한예종 무용원도 함께 다녔습니다. 지금도 한 사람은 한국에, 한 사람은 러시아에 있으면서도 날마다 통화하는 우애 좋은 형제로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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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한테 직접적으로 그만두고 싶다는 얘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제가 형한테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많이 받았어요. 형도 있지만 제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분들한테서 힘을 받았던 거 같아요. 제가 인복이 있어요. 저는 혼자서 삭히는 편이기는 한데, 은근슬쩍 얘기를 하면서 조언을 많이 들으려고 하는 편이에요. 그러면서 마음을 치료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김기완이 김기민의 '원격 멘탈 케어' 담당이었던 셈이네요. 김기완은 이번에 자신의 직장이기도 한 국립발레단에서 주역으로 춤춘 동생의 공연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외국에서 오랫동안 고생하던 동생의 '금의환향'을 보는 느낌이었을까요. 김기민은 마린스키 발레단 내한 공연이나 갈라 공연으로 한국 무대에 선 적이 있기는 하지만, 김기완이 몸담은 국립발레단 공연의 주역이라 아마 더 특별했을 겁니다. 김기민은 마침 형이 입었던 솔로르 의상을 입고 무대에 섰습니다.
'인복 많은' 김기민에게는 그가 러시아 엄마, 아빠로 부르는 스승 블라디미르 킴과 마르가리타 쿨릭 부부도 있습니다. '블라디미르 킴 선생님'은 지금도 마린스키 발레단의 지도위원으로 재직 중입니다. 그는 러시아인이지만 고려인 3세라는 인연도 있습니다. 김기민은 현재 선생님과 함께 강아지를 키우고 있다고 했어요.
암 투병 팬이 남긴 편지... 김기민이 발레 하는 이유는?
김기민은 최근 출연했던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특별한 팬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김기민의 춤을 사랑했던 팬이 유산을 남겨줬다는 얘기로 화제가 됐었는데요, 김기민은 이 팬이 재산 중 일부를 자기 앞으로 남겨줬다며, 이를 좋은 목적을 위해 기부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팬 이야기를 들려줬는데요, 바로 김기민에게 '내가 발레를 하는 이유'를 다시 성찰하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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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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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문화전문기자 shki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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