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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1 (일)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날리던 날 [양희은의 어떤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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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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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양희은 | 가수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제법 날리던 날 모임 식구들은 냉면집을 찾았다. 가게 문 여는 시간보다 20여분 일찍 도착했지만 이미 내 앞에 18명의 대기자가 있었다. 밖에 서서 기다리자니 바람도 쌀랑하고 아니나 다를까 콧물과 재채기가 시동을 건다. 차 안에 들어가 기다리자니 친구들이 차례로 도착, 일단 여자 셋이 차 안에서 그간의 안부를 묻는다. 두루 나눠 먹으려고 반듯하고 하얀 식빵을 샀다는 후배에게 나도 친구가 권하는 바람에 먹어봤다고 했다. 비싸진 않아도 아침에 구워 먹음 좋을 것 같아 들고 왔다는 마음씨 고운 후배, 울산 사는 지인에게 선물로 두봉지나 사서 기차 타고 가면서 행여 식빵 모양이 찌부러질세라 양손에 한봉지씩 곱게 들고 갔더니만 그 동네 아파트 앞에 그 빵집이 있더란다. 이튿날 아침의 톡 “언니! 이 식빵 미쳤어. 최고 최고. 굽는데 우유 냄새 진동 … 처음이야 ㅋ.” 우리 모임 여섯 사람의 아침이 최고의 빵 굽는 냄새에 취해 행복했다. 변함없이 늘 같은 맛의 냉면, 면수, 불고기, 반찬 등을 먹으며 설거지 필요 없는 ‘물장수 상’을 만들었다. 어떻게 이리도 한결같은 맛을 지킬까? 보통 일은 아닐 거야. 긴 세월 같은 맛을 유지하는 게 쉽겠어? 주방장이 바뀌더라도 맛은 그대로라 언제건 그리워서 찾으면 고맙게도 늘 같은 맛이라는 것. 아무리 규모가 작아도 동네 어귀에 이런 가게가 있으면 참 고맙다. 그런데 오랜만에 그 골목을 지나는데 묘하게 썰렁하면서 낯선 기운(?)이 돌면, 임대라고 써 붙여져 있거나 얼마 전까지 북적이던 흔적도 없이 텅 비어 있다. 동네 마실을 자주 다니는 편은 아니지만 가끔 낯익은 간판이 사라진 걸 보는 일은 이상하게 적적하고 허전하다.



가을따라 바다 건너 사는 친지들이 많이 다녀갔다. 방을 얻었지만 한곳에 머물지 않고 하루가 멀다고 바람 따라 여행을 떠난다. 세상에! 무슨무슨 범선을 타고 몇몇 항구 구경하고 지방마다 다니면서 자기 사는 땅엔 없는 생들기름을 몇병씩 사고 몸에 좋다는 무슨무슨 청도 사고 친정집 털어가듯 필요한 먹거리를 구하더니만 떠날 짐을 싼다는데 빵은 버릴망정 우리나라에서 구하고 선물 받은 건 하나도 남김없이 잘 포장해 넣었단다. 우리 유전자 안에 새겨진 냄새와 맛의 기억은 이렇게 진하구나. 어린 날의 그 맛이 결국 뒷덜미를 잡는구나. 친구는 도착해서 짐 풀면 우리 집으로 온다. 내가 차려준 밥상에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물장수 상을 만든다. 냉면집에 이은 두번째 물장수 상이다. 무슨 비싼 재료도 아닌 호두 넣어 볶은 멸치, 들기름과 된장에 지진 우거지, 깨순나물, 취나물, 콩나물, 무생채에 생선 한토막 정도인데, 지난 번에 우거지 너무 맛있다길래 넉넉한 통에 듬뿍 해서 건넸다. 하도 바람 따라 다니길래 “우거지 준 거 다 먹기나 했어? 얼렸어?” 했더니 펄쩍 뛰면서 “무슨 소리야? 잡곡밥 해서 싸 들고 다니며 남김없이 다 먹었어. 바쁜 사람이 만들어준 걸 어떻게 안 먹냐?” 구경은 많이 했냐고 물으니 “내 나라가 귀하지. 산이 없냐? 계곡이 없냐? 개울이 없냐? 호수가 없냐? 바다가 없냐? 들판이 없냐? 사막도 있다더라, 사구!! 이렇게 아기자기하게 죄다 있는 나라가 어딨어? 감사하고 귀해” 한다. 떠나 사는 이들은 나름의 애틋함이 있다. 그리운 동네 어귀와 친정… 그리고 친지들 해가 갈수록 하나둘 떠나고 죽어서 남의 나라에 묻히긴 싫다는 바람. 남편이 가족 묘지 운운하는 데다 대고 “싫다. 내가 왜 너네 땅에 묻히냐? 난 죽어서는 내 나라 땅에 묻힐 거야.” 듣는 남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흐르더란다, 섭섭했겠다. 긴 세월 일가를 이루고 살았는데도 느네 땅, 우리 땅 운운했으니 함께 산 세월이 민망했겠다. 친구는 뇌경색이 지나간 후 우리 땅의 먹거리 챙기기와, 자기 집에서 말도 못하는 정성으로 아침 녘에는 2시간 동안 풀 뽑고 달팽이 잡고(사정없이 잎사귀를 뜯어먹는단다) 개와 함께 강변 산책을 한 후 자기가 먹을 채소를 관리하며 보냈다는데 얼굴이 까맣게 그을렸다. 뇌경색 겪은 후 건강관리에 철저해진 그 마음도 알 듯하다. 내 남편의 뇌경색 소식에 안쓰러워 하며 건강정보를 알려준다. 간호사로 몇십년 세월인데 말해 무엇하리? 운동과 잡곡밥, 따뜻한 물 많이 마시기, 고기보다는 생선, 미루지 말고 하고픈 일 하고 살기 등등.



친구는 엄마 방에서 한바탕 울더니 “그리워서 그래, 그리워서!” 했다. (나는 엄마의 방을 그대로 놔두었는데) 옷 서랍에서 엄마의 잠옷을 꺼내입고 엄마의 침대에서 하룻밤 자고 갔다. 나보다 더 울 엄마와의 추억이 많은 친구! 잘 가! 내년 봄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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