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디프 자우하르 지음, 서정아 옮김, 글항아리(2024) |
연말이니, 올 한 해 읽었던 과학책 중 가장 좋았던 것들을 꼽아보았다.
‘블루 머신’은 지구에서 가장 큰 기계라 할 수 있는 바다의 구조와 특성을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서술한 책이다. 영국 해양물리학자 헬렌 체르스키가 미시와 거시, 물리학과 생물학, 과학과 역사를 엮어서 이 푸른 기계의 얼개를 설명하는데, 이토록 방대한 주제를 흥미로운 내러티브로 조직하는 솜씨가 실로 탁월하다. 과학 교양서에서 무엇보다 지적 포만감을 맛보길 원하는 독자에게 백 점짜리인 책이다.
엠알엔에이(mRNA) 연구로 202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헝가리 출신 생화학자 커털린 커리코의 회고록 ‘돌파의 시간’은 코로나19 백신 신속 개발로 이어진 그의 연구를 알려준다. 그런데 영웅 서사처럼 느껴지는 그 승리의 결과보다 오히려 더 인상적인 지점은 과학 연구를 일생의 과제로 삼은 한 여성이 어떻게 공사 양면에서 온갖 난관을 돌파하며 자신을 지켜왔는가 하는 분투의 과정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위의 두 책 모두 올해의 과학책으로 꼽기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으나, 그래도 내가 맨 위에 놓고 싶은 책은 ‘내가 알던 사람’이다. 알츠하이머병을 앓으며 차츰 기억을, 세상을, 끝내 자신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보살폈던 아들의 기록인 이 책은 자식이 쓴 아버지의 전기인 동시에 뇌, 자아, 의료의 문제를 탐구한 과학책이다. 후자의 탐구에 적잖은 페이지가 할애된 것은 저자가 현직 내과 의사인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의료 종사자가 알츠하이머병을 겪는 가족을 간병하고 쓴 책은 선례가 없지 않다. 구술생애사 작가이자 요양보호사인 최현숙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어머니를 죽음까지 동행하며 적은 ‘작별 일기’가 맨 먼저 떠오른다. 정신과 의사 아서 클라인먼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아내를 돌본 경험을 담은 책 ‘케어’도 있다. 그 계보를 잇는 ‘내가 알던 사람’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의료인으로서 원칙과 간병인으로서 실리가 대립하는 순간들의 딜레마와 좌절을 윤색 없이 담아낸 저자의 고백적 목소리다.
이런 장면이 있다. 인지능력 저하로 편집증이 심해진 저자의 아버지가 각종 수발을 도맡고 있는 입주 간병인을 쫓아내려고 한다. 필요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돈을 줄 순 없다고 우기는 것이다. 저자의 형과 여동생은 아버지에게 간병인이 무급으로 일하고 있다고 거짓말하자고 제안한다. 저자는 반대한다. 아들로서 아버지를 속이기 싫어서만이 아니라, 의료인으로서도 환자가 사실을 모르는 편이 낫다는 판단으로 거짓 정보를 제공하는 온정주의는 기만이라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전략으로도 아버지는 설득되지 않고, 저자는 결국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 (간병인이) 이제부턴 무급으로 일하겠대요. 돈은 필요 없고, 먹을 것과 지낼 곳만 있으면 된다는데요.” 아버지는 이내 편안한 표정으로 바뀌며 대답한다. “그럽시다, 어서 들어와요.” 그 거짓말 덕분에 간병인은 환자가 임종할 때까지 곁에서 돌볼 수 있게 된다.
김명남 과학책 번역가 |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아버지를 보며 ‘내가 알던 사람’을 잊지 않기 위해서 쓴 이 책은, 그래서 아버지의 초상인 동시에 알츠하이머병의 초상이다. 둘 사이 경계선이 흐리다는 점이 이 병의 비극이지만, 책은 후자가 전자를 돋보이게 하는 액자로도 기능한다는 걸 섬세하게 보여준다. 원제는 ‘내 아버지의 뇌’.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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