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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3 (금)

격노하고 폭주하는 남성성과 민주주의의 적 [권김현영의 사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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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2일 오전 서울역에서 시민들이 윤석열 대통령 담화를 텔레비전으로 보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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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김현영 | 여성현실연구소장



2024년 12월3일 밤 11시 이후 일상생활의 리듬이 모두 깨졌다. 아마 우리 모두 그럴 것이다.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이 사태 이후의 일상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나의 촌극으로 만들어보기도 하고, 문제가 금세 해결될 것이라고 믿으며 어떻게든 다룰 만한 문제로 만들어보려고 하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다 말고 악몽을 꾸거나 걷다 말고 멍하니 일상의 평화가 낯설어지곤 하기 때문이다. 이 칼럼을 쓰고 있던 순간에도 전 국방부 장관 김용현의 자살 시도 소식, 내란 수괴 윤석열의 내란 선동 담화가 이어졌다.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렵다.



지난 열흘간 일어난 일을 복기해본다. 12월7일, 안철수·김예지·김상욱을 제외한 105명의 국민의힘 의원들은 국민을 향해 총을 겨누고 국회의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 내란 수괴에 대한 탄핵 표결조차 참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탄핵 트라우마’로 설명했다. 아직 군사주의의 상흔이 남아 있는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이렇게나 많이 생존해 있는 나라에서 위헌적 비상계엄이라는 희대의 문제적 장면을 연출하여 국민 모두에게 총 앞에 서 있는 ‘계엄 트라우마’를 안겨준 집단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차마 믿을 수 없는 표현이다. 12월12일 발표된 리얼미터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 중 66.2%가 ‘계엄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고 답했다. ‘탄핵 트라우마’라는 말은 그 자체로 가해자가 피해자의 언어를 탈취하는 부정의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한국의 민주주의가 이대로 퇴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낙관이 우세하다. 밤늦게 국회 앞에 모여 표결에 참여하러 온 국회의원들이 담을 넘을 수 있도록 손을 잡고 등을 밀어준 시민들과 무장군인 앞에서 맨몸으로 막아선 시민들이 있고 지난 열흘 동안 광장의 민주주의를 만든 시민들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 민주주의의 가장 큰 취약점이라면 바로 권력이 주권자인 민중에게 있지만 정작 민중은 그 권력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여건을 갖지 못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어떻게든 참여의 공간을 창출해냈다. 제대로 된 파업권조차 없어서 창의적인 쟁의 행위를 발명해낸 것처럼, 평일에는 점심시간과 퇴근 이후를 이용해서, 주말에는 광장에 모여서 저항 행동의 레퍼토리들을 갱신해가고 있다. 질 생각이 전혀 없는 시민들의 행렬은 점점 더 길어지고 있다. 광장은 이질적이고 시끄럽고 다양한 불화가 존재하지만 이전처럼 광장에 나온 여성과 10대들 뒤에 배후세력이 있는지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없다. 광장의 시민들은 자신이 주권자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것이 탄핵을 낙관하는 근거다.



그러나 탄핵 이후는 낙관하기 어렵다. 당장 내란 수괴는 자신의 비상계엄 선포는 야당을 대상으로 한 경고성이었다며 하야는 없고 탄핵을 당한다면 법정에서 끝까지 다툴 것을 예고했다. 누가 변호인단이 될 것인지, 현재 헌법재판관의 수와 재판관의 정치 성향에 대한 분석이 넘쳐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법이란 무엇인지 누구를 위한 법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다. 내란 수괴가 가장 즐겨 쓰는 정치적 레토릭은 ‘법치’였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모두 안다. 그에게 있어 법치는 곧 자기 의지의 실현이었다. 급기야는 자신의 의지가 법 그 자체라고 선포했다. 계엄을 헌법에서 대통령에게 보장한 ‘고도의 통치 행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일종의 법물신론자라고 할 수 있다.



현직 대통령에 의해 일어난 12·3 내란사태의 핵심은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을 통제받지 않기 위해 헌정 질서를 부인하고 포고령이라는 형태의 법을 공표한 것이다. 왕정국가의 왕이, 전세계의 독재자들이 정확히 이렇게 했다. 윤석열은 주장한다. 경고성 계엄이었을 뿐 진심은 아니었다고, 야당의 폭거를 알리기 위해서였다고. 단지 그것을 위해서 현행법을 무시하고 국민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그는 광장의 페미니스트들이 표현한 대로 ‘폭주하는 남성성’의 화신이다. 상습적으로 격노하고 타인의 말을 조금도 경청할 줄 모르며 자신의 말이 곧 법인 줄 아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격노하는 가부장의 화신은 더 이상 민주사회의 리더는커녕 일원조차 아니다. 그저 범죄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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