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정권퇴진·한국사회대전환 제주행동이 주최하는 ‘윤석열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제주도민대회’ 집회 시작 전 안내 화면. 임기환 상임대표 제공 |
“우리는 성별·성적지향·성별정체성·장애·연령·국적 등에 관계없이 모두가 동등한 참여자입니다. 모든 참여자는 여성·성소수자·장애인·청소년·이주민 등 사회적 소수자를 차별하거나 대상화하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지난 5일 오후 7시 제주시청 앞에서 열린 ‘윤석열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제주도민대회’ 사회자가 집회 참여자들에게 꼭 지켜달라 당부한 내용이다. 제주지역 3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꾸린 윤석열정권퇴진·한국사회대전환 제주행동은 이날 이후 집회를 할 때마다 ‘평등한 집회를 위한 모두의 약속’을 안내하고 있다. 임기환 제주행동 상임대표(민주노총 제주본부장)는 “내란 사태 직후인 4일 집회 발언자 가운데 한 분이 (김건희를 비판한다는 취지로) 여성을 폄훼하는 표현을 썼고, 이에 대한 참여자들의 문제 제기가 있었다”며 “다양한 분들이 집회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으며 안전하고 평등한 집회를 하자는 취지로 여성단체에서 만든 ‘평등한 집회를 위한 모두의 약속’을 공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간 다양한 집회를 열고 참여해 온 그로서도 이런 공지를 본 건 처음이다.
불특정 다수의 다양한 시민들이 매일 저녁 “윤석열 퇴진”을 외치며 광장으로 향하고 있다. 같은 목표를 위해 광장으로 나온 이들이지만, 가지각색의 응원봉처럼 저마다의 개성과 가치관은 다르다.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7일 열린 탄핵 촉구 집회 무대에 오른 페미당당 심미섭 활동가가 “탄핵을 외치며 여성혐오를 하지 말자”는 발언에 ‘끌어내려’란 거부 반응과 열띤 응원이 공존했다. 박구용 전남대 교수는 8일 팟캐스트 ‘매불쇼’에서 남성들의 집회 참여를 독려하며 ‘여성들이 많이 나온다’는 부적절한 발언을 해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했다”며 사과하기도 했다. 그러나 광장에서 다양한 의견과 문제 제기에 대해 ‘국론 분열’을 염려하기 보단,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평등한 광장’을 만들어보자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제주뿐 아니라 대구 중구 동성로에서 열리고 있는 ‘윤석열퇴진 대구시국회의’에서는 무대 발언자들에게 아래와 같은 내용의 주의사항을 안내하고 있다.
1. 여성, 청소년,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등을 비하하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2. 공개적 또는 특정 누군가에게 외모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칭찬도 하지 않습니다.)
3. 전체에게 또는 특정 누군가에게 반말을 하지 않습니다.
4. 말을 놓거나 위계적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특히 청소년에게 ‘기특하다’, ‘대견하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집회 중계 영상을 보다 주의사항이 뜬 장면을 갈무리해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에 공유한 대구청소년인권단체 ‘얼라들’의 미호 활동가는 “함부로 반말하지 말라”는 말이 가장 와 닿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주민·성소수자·여성·청소년 등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를 함께 호명하고 있는데, 집회 참여자 서로가 단절돼 있지 않고 연결돼 있음을 다시 한 번 상기할 수 있는 그런 약속이었다”고 말했다.
대구청소년인권단체 얼라들의 미호 활동가가 갈무리해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에 공유한 대구 탄핵 촉구 집회 화면. |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의 수영 활동가도 “이런 집회 문화가 확산되길 바라는 마음”에 자신의 에스엔에스 계정에 대구 집회 사진을 올렸다. 아수나로는 ‘청소년들과 광장에서 함께하는 법’이라는 전단지에서 “청소년들은 보호받을 존재나 누군가의 자녀가 아닌, 목소리를 낼 권리를 가진 시민으로서 광장에 함께 한다”며 “청소년들의 운동을 내려다보듯 칭찬할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이미 청소년을 평등하게 대하지 않는 것”이라고 안내해왔다.
차곡차곡 쌓여온 광장의 유산
평등한 집회에 대한 고민은 이번에 처음 시작된 게 아니다. 2016년 10월29일 시작해 5개월간 이어진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집회에서도 “암탉이 울면 집안 망한다”, “앞으로 100년 내로는 여성 대통령 꿈도 꾸지 마라” 같은 미소지니(여성에 대한 혐오·멸시, 뿌리 깊은 편견)에 기반을 둔 정치인들의 발언, 광장에서의 성폭력 문제가 있었다. 당시 여성 대통령 같은 권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가 성적 대상화나 여성 혐오가 아닌 성평등한 관점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최근 만들어 공개한 ‘평등한 집회를 위한 모두의 약속’ 은 2016~17년 탄핵 국면에서 활용한 내용에서 다양한 소수자를 차별하지 말라는 당부 등이 더해졌다.
비슷한 시기 대구·경북 시민사회에서는 청도군 삼평리의 송전탑 건설 반대운동 과정에서 발생한 성폭력·위계 폭력을 계기로 ‘평등한 집회를 위한 7가지 체크리스트’(인권침해 발언에 대한 주의사항 강조, 장애인 접근성 확보, 인권침해 제보 연락처 공지 등)를 마련했다. 진냥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활동가는 12·3 내란사태 이후 에스엔에스에 2016년 만들어진 ‘평등한 집회를 위한 7가지 체크리스트’를 올리며 “여전히 유효하니 많이 참고해서 활용해달라”고 소개했다.
대구·경북 시민사회에서 2016년 송전탑 건설 반대운동 과정에서 발생한 성폭력·위계 폭력을 계기로 마련한 ‘평등한 집회를 위한 7가지 체크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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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발생한 내란 사태로 인해, 광장은 하루하루 넓어지고 있다. 제주에서 열리는 집회 무대의 경우 아직 휠체어 접근이 어려운 상황이다. 임기환 제주행동 상임대표는 “이동식 경사로를 설치해 발언 기회를 넓히거나 아예 무대를 없애고 만민공동회 같은 장을 열어볼까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양이현경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는 “(12일 대통령 대국민 담화 직후) 집회 참여자들 사이에서 미치광이 같은 표현들이 많이 나오는데 실제 정신 질환을 가진 분들이 불편할 수도 있어 이런 부분에 대한 안내를 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탄핵을 촉구하는 과정에서 여성차별·혐오 발언을 하지 말라는 당부에 항의하는 집회 참여자들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온라인 공론장에서의 갈등과 반목이 오프라인 광장에서 누그러질 수 있을 거란 희망을 봤다는 이가 있었다.
“온라인 공간에선 여성혐오를 하는 이들과 페미니스트 사이에 관용을 발견하긴 어렵다. 적어도 하나의 공유 지점을 갖고 오프라인에서 매일 만나 응원봉을 함께 흔드는 사이가 됐을 때, 그나마 소통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청소년·청년뿐 아니라 노년층까지 함께하는 집회 현장에선 온라인 공간보다 좀 더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소통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진냥 활동가)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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