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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4 (토)

[편집자 레터] 어둠 속에서 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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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곽아람 Books 팀장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촉각적 순간들에 집중하고 싶었다. 침묵과 어둠 속에서, 손톱을 바싹 깎은 여자의 손이 남자의 손바닥에 몇 개의 단어를 쓰는 장면을 향해 이 소설은 느린 속력으로 전진한다. 영원처럼 부풀어 오르는 순간의 빛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신의 연한 부분을 보여준다. 이 소설을 쓰며 나는 묻고 싶었다. 인간의 가장 연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그 부인할 수 없는 온기를 어루만지는 것-그것으로 우리는 마침내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덧없고 폭력적인 세계 가운데에서?”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문 ‘빛과 실’에서 이 구절을 읽고 ‘희랍어 시간’(문학동네)을 펼쳤습니다.

말을 잃은 여자는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의 희랍어 수업을 듣습니다. 어느 날 안경을 잃어버린 남자를 여자가 집으로 데려다주고, 식탁 위 백열등과 책상 위 갓등의 빛에 기대, 여자는 남자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며 마침내 소통합니다. “왼쪽 손바닥을 간지럽히며 지나가던 따스한 획과 점들을 살갗이 먼저 기억한다. 가늘게 떨며 망설이는 손. 손톱이 지나치게 바투 깎여, 그의 살을 조금도 아프게 하지 않던 손가락. 서서히 드러나는 음절. 침이 없는 압정 같은 마침표. 서서히 밝아지는 한 마디 말.”

소설은 입술과 눈꺼풀을 여러 번 호명하며 여자와 남자가 상실한 감각을 환기합니다. 인체의 이 두 부위는 아마도 한강이 강연에서 언급한 인간의 ‘연한 부분’과 연결돼 있을 겁니다. 소설 속 여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 몸에 눈꺼풀과 입술이 있다는 건.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 잠길 수 있다는 건.”

한강 작품이 무겁고 어두워 읽기 망설여진다는 분들께 ‘희랍어 시간’을 권합니다. 어둠에서 빛을, 침묵에서 소리를 길어 올리는 이야기. 혼돈을 버텨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될 만한 작품입니다. /곽아람 Books 팀장

[곽아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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