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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5 (일)

탄핵 집회에 힘 싣는 이 음악…‘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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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21년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린 살바도르 아옌데 48주기 기념식에서 한 시민이 아옌데 전 대통령의 대형 사진을 들고 있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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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와 공연장 안팎의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그래서 붙인 코너 이름이 ‘무대뒷담’이다. 첫 회를 클래식 음악계에 넘치는 신동과 천재, 스타들 얘기로 시작해볼까 했다. 하지만 시국이 시국 아닌가. 이런 분위기에 어울릴 만한 주제는 없을까 머리를 싸매다 퍼뜩 떠오르는 음악이 있었다.



독일 피아니스트 이고르 레비트(37)는 ‘행동파 피아니스트’로 불린다. 정치·사회 현안에 활발히 발언한다고 얻은 별칭이다. 그가 2015년 세 곡의 변주곡이 담긴 음반을 냈다. 두 곡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변주곡 하면, 바흐 ‘골드베르그 변주곡’과 베토벤 ‘디아벨리 변주곡’이 양대산맥이니까. 나머지 한 곡은 이름도 생소한 미국 작곡가 프레더릭 제프스키(1938~2021)의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였다.



이 곡은 드라마틱한 첫 부분 주제부터 귀에 쏙 꽂힌다. 쉽게 잊힐 것 같지 않은 선동적인 멜로디가 심장을 두드린다. 곡에 정신없이 빠져들다 보면, 중간에 휘파람 소리, 피아노 뚜껑을 치는 소리도 들린다. ‘오래된 음악과 새로운 음악, 대중적인 것과 실험적인 것들이 내적 통일성으로 결합해 엄청난 다양성을 지닌 작품.’ 미국 일간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골드베르그 변주곡, 디아벨리 변주곡과 같은 위상으로 이 곡을 격상시키며 내린 평가다. 때때로 불협화음이 들리지만, 조금만 견디면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독성 있는 익숙한 선율이 나타나니까. 1시간 2분에 이르는 이 긴 곡이 요즘 버스 출퇴근길 나의 애창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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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파 피아니스트’ 이고르 레비트가 2015년 3개의 변주곡을 녹음해 발매한 음반. 소니클래시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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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주곡이란 어떤 주제를 바탕으로 그 리듬과 선율, 화성을 끊임없이 변형시켜 만든 곡을 말한다. 아무리 극단적으로 변형해도 그 주제의 씨앗만은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게 원칙. 제프스키가 쓴 이 변주곡의 주제가 바로 칠레 민중가요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El pueblo unido jamás será vencido)이다. 그렇다. 처음부터 이 곡은 거리의 노래였다. 지금도 남미를 비롯해 전세계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널리 불리는 노래다. 우리로 치면 ‘임을 위한 행진곡’쯤 될까.



이 곡을 1970년 칠레 좌파 작곡가 세르히오 오르데가(1938~2003)가 썼다. 칠레 좌파 정당 연합인 ‘인민연합’ 찬가로 작곡한 노래였다. 그해 인민연합 통합 후보로 출마한 살바도르 아옌데(1908~1973)는 남미 최초로 민주적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돼 대대적인 개혁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미국과 군부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3년 뒤 육군참모총장 피노체트가 미국의 비호 아래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민간정부를 무너뜨렸다. 대통령궁에서 저항하던 아옌데 대통령은 자결했고, 이를 계기로 이 노래가 전세계에 급속히 전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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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9월 칠레 육군참모총장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아옌데 대통령이 있는 대통령궁을 폭격한 장면.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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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스키가 이 노래를 주제로 변주곡을 작곡한 것은 쿠데타에 성공한 피노체트가 대통령에 오른 직후인 1975년이다. 이듬해 워싱턴 D.C. 케네디 센터에서 열린 미국 200주년 기념 행사에서 초연됐다. 칠레 인민연합에 대한 찬가를 초연한 장소로는 꽤 대담한 선택이었다. 제프스키는 왜 칠레의 저항 노래를 변주곡 주제로 선택했을까. 제프스키도 행동파였다. 직설적인 정치 발언을 주저하지 않았고, 칠레의 정치 상황에 대한 관심도 지대했다. 6개씩 6개의 묶음으로 이뤄진 36개의 변주곡은 칠레 민중이 헤쳐나가야 했던 고난과 풍파를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2021년 작곡가 제프스키가 작고하자 피아니스트 레비트가 뉴욕타임스에 쓴 부고에서 이 변주곡을 언급했다. “제프스키는 이 곡이 세상의 정치적 결과를 바꿀 거라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았어요. 피아노 한 곡이 세상을 구할 수는 없겠지요. 그는 자신이 바라던 아름다운 혁명을 보지 못할 테지만, 어쨌든 혁명은 올 것입니다.” 레비트는 “제프스키가 피노체트에 대해 얘기해줬고, 그의 작품들 때문에 스페인 내전, 칠레 봉기에 대해 읽기 시작했다”고 떠올렸다. 2022년 10월 레비트의 첫 국내 리사이틀을 관람한 적이 있다. 당시 인터뷰에서 그는 “제가 속한 사회를 위해 책임감 있는 시민으로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자신이 행동파 피아니스트가 된 이유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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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프레더릭 제프스키(왼쪽)와 피아니스트 이고르 레비트. 뉴욕타임스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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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변주곡은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여러 피아니스트 연주로 들을 수 있다. 레비트 외에 캐나다 피아니스트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의 유려한 녹음을 첫손에 꼽고 싶다. 2013년 밴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한 우크라이나 피아니스트 바딤 콜로덴코는 지난 3월 금호아트홀에서 이 곡을 연주한 적이 있는데, 그 역시 이 곡을 음반으로 남겼다. 작곡가 자신이 연주한 버전도 있고, 국내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이상욱의 실황 음반도 있다. 유튜브에서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를 치면, 이소선 합창단 등의 합창곡 버전도 찾을 수 있다. 이탈리아 재즈 피아니스트 조반니 미라바시의 연주도 들어보시길.



아마, 요즘 여의도 국회 앞이나 전국 어느 곳의 시위 현장에서도 이 노래가 불리고 있을지 모른다. 혹시 집회에 나가기 어려운 처지라면, 이 노래나 제프스키의 변주곡을 들으면서 마음을 보태는 것도 하나의 방법 아닐지.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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