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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4 (토)

12·3 내란에 잠 못 든, 그 시절 강제징집·불법구금 피해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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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980년 5월15일 ‘서울의 봄’은 절정을 이룬 듯했다. 서울역 앞에 운집해 신군부 성토대회를 연 대학생 10만여명은 총학생회장단의 결정에 따라 남대문으로 향하던 행진을 멈추고 자진해산하는 ‘서울역 회군’을 단행했다.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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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매듭 지어진 게 하나도 없잖아요. 국가가 저희한테 잘못을 사과한 적도 한 번도 없으니까…. 문제를 뿌리 뽑지 못했으니 잘못된 정치가가 나타나고 계엄령이 터지고, 이런 일이 반복된다고 생각해요.”



김병진(69)씨는 내란죄 피의자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지난 3일, 한 순간도 잊을 수 없는 40여년 전 일을 떠올렸다. 재일교포 2세인 김씨는 ‘간첩 조작 피해자’다. 김씨는 ‘계엄의 시대’를 살았다. 일본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1970년대 말 모국으로 유학을 와서 연세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계엄이 선포되는 혼돈 속에서 김씨는 1980년 5월15일 서울역 광장 회군 때도 역사의 현장을 지키기도 했다. 김씨가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1983년 7월 김씨는 돌연 보안사령부(지금의 국군방첩사령부)에 끌려갔다. 4개월 넘는 고문과 회유 속에 김씨는 ‘간첩’이 됐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본어 통역이 필요했던 보안사는 김씨는 1984년부터 2년간 강제로 통역으로 근무하게 했다.



“감금되고, 감시 받고…. 그때 우리 아이가 100일이 안됐을 때였어요. 아이가 갓난아기 때부터 지금 40살이 될 때까지, 40년을 그 멍에를 짊어지고 살았습니다.”



김씨는 자녀 출산을 핑계로 보안사를 퇴사하고 일본으로 도망을 와 보안사에서 겪은 이야기를 토대로 한 책 ‘보안사’를 1988년 출간했다. 대학원을 휴학한 상태였기 때문에 금방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정부는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을 이유로 김씨를 지명수배하고 여권발급을 금지시켰다. 2000년이 돼서야 15년만에 김씨는 한국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 김씨는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저는 ‘잃어버린 40년’이라고 부릅니다”라며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없습니다. 저는 일본에서 온전히 직장생활도 하지 못하고 이 나이 돼도 연금도 못 받는데, 저한테 고문한 사람들은 연금 타고 떵떵거리면서 잘 살고 있잖아요”라고 말했다.



김씨는 지난달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 규명 결정을 이행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았다. 진실화해위가 2010년 ‘국가의 사과’를 권고했지만, 행정안전부는 ‘해외 거주 이행 불가’라는 사유를 제출했다. 김씨는 “국가가 잘못했다면, 피해자들이 소리를 내지 않아도 알아서 찾아와서 잘못했다고 하는 게 맞잖아요. 국가의 태도에 정말 실망스러웠습니다”라며 “제가 경험한 보안사와 지금 방첩사는 하나도 변한 게 없어요. 정부 기관도 피해 구제와 회복을 위한 어떤 노력도 한 게 없습니다. 그게, 제가 생각하는 이번 사태의 이유입니다”라고 말했다. 손해배상 소송 과정에서는 어떤 2차 피해가 있을지 김씨는 “두렵다”고 했다.



이준휘(66)씨는 재판 과정에서 이미 2차 피해를 입었다. 이씨는 계엄령이 선포된 시기인 1980년 5월 당시 연세대 공과대학 학생회장으로, 민주화운동 집회에 참석했다. 당시 계엄 포고령이 내려지며 정부는 모든 집회·시위를 금지하고 대학 휴교령을 내렸다. 이씨는 체포됐고 모진 고문을 받았다. 당시 이씨를 잡아넣은 명분은 계엄포고령 10호였다. 윤 대통령이 지난 3일 발령한 포고령과 내용이 비슷하다. 이씨는 그해 9월 신체검사를 받고 이틀만에 ‘강제징집’을 당했다. 이씨는 전두환 정권의 1호 강제징집 대상이었다. 당시 도피 생활로 몸이 상해 이씨는 탈장까지 됐지만 군은 이씨를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33개월 복무를 마치고 제대를 앞두고서는 일명 ‘녹화공작’을 실시하며 학생운동 사항을 밀고하라는 지시를 받고 2년 동안 보안사에 정보보고를 해야 했다.



2003년부터 17년간 외국에 나가 사업을 했던 이씨는 주변에서 강제징집 배상을 신청하라고 했지만 하지 않았다. 이씨는 “저는 이미 대한민국이 민주주의가 이룩됐으니 그런 과정이 필요할까 생각했어요”라며 “그런데 한국에 와서 보니, 2900명이나 강제징집 피해자가 있는데 아직도 190명 정도밖에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라고 했다. 강제징집 사건과 관련해 진실화해위의 권고가 있고도 국방부·행안부·교육부·경찰청 모두 후속 조처를 이행한 상황도 아니었다. 이씨는 강제징집 피해를 제대로 알리고, 보상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최근 손해배상 신청을 하게 됐다.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받아든 정부의 답변서는 더 실망스러웠다. 정부 쪽 소송수행자인 군법무관은 답변서에서 “헌법상 국방의 의무는 누구나 이행해야 하는 것으로, 원고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복무를 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씨는 “저는 아픈 상황에서 제 의사에 반해 군대에 끌려가 강제로 복무를 하고, 이후 프락치 활동까지 강요받아야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답변서를 받아들고 황당한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답변서를 받고 이틀 뒤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군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답변밖에는 할 수 없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엄 이후 또 다시 불면의 밤이 며칠간 이어졌다. 이씨는 “정부의 수장이란 사람이 과거사를 규명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지 않으니, 정부 부처들도 다 소극적이고, 무관심했던 것”이라며 “제대로 된 피해 회복 노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이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이번 계엄 사태가 오래 이어졌다면, 저같은 피해자들이 또 생겼을 것”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역사에는 매듭이 필요하고, 청산이 필요한 것이다. 저 말고 많은 사건의 피해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현은 기자 mi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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