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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5 (일)

‘방구석 양조장’의 탄생…“술 보면 꼭 자식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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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씨(27)가 지난 3일 서울 강북구 미아동에 있는 그의 집에서 막걸리를 빚기 위해 쌀을 찜통에 넣고 있다. 강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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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씨(27)의 한 달 쌀 소비량은 20㎏이다. 공깃밥으로 따지면 200인분은 거뜬히 만들 수 있는 양이다. 친구 세 명과 함께 살긴 하지만, 이들이 밥을 차려 먹는 날은 드물다. 배달 음식으로 끼니를 때울 때가 많다고 했다. 쌀은 그럼 다 어디에 쓰이는 걸까. 밥을 짓는 게 아니라 술을 빚는 데 쓴다. 김씨는 “막걸리 만드는 게 가장 큰 취미”라고 했다.

스무 평 채 안 되는 거실·부엌이 간이 양조장으로 변한 건 올해부터다. “술 만들어보자는 얘기는 진작에 나왔어요. 실행에 옮기질 못했을 뿐이죠. 새해가 되니까 ‘지금 아니면 못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바로 누룩이랑 재료들을 구해왔어요.” 지난 3일, 서울 강북구 미아동에 있는 김씨의 집에서 그가 흐르는 물에 쌀을 여러 번 헹궈내며 말했다.

익숙한 초록병을 ‘부어라 마셔라’ 하는 대신 좋은 술을 만들어 먹는다는 2030이 늘고 있다. 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가양주’(家釀酒·집에서 빚은 술)를 검색하면, ‘곰손도 가능! 막걸리 빚는 법’ ‘나만의 막걸리 자랑 좀 해본다’ ‘직접 담근 술 함께 마셔보는 모임’ 등을 언급한 게시물이 줄줄이 나온다. ‘집에서 술 만들기 시리즈’ 동영상을 올리는 한 주류 유튜버의 구독자 수는 63만명이 넘는다. 김씨는 “주위에 가양주 원데이 클래스를 듣는다는 친구들도 많이 봤다”고 말했다.

술 만드는 이들은 냉장 숙성하던 막걸리 유리병이 터져 놀란 적도 있고, 정성스레 담근 밑술에 허연 곰팡이가 내려앉아 실망하기도 했으며, 증류주를 내리다 실수로 불을 내버린 적도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술 빚는 일이 제일 재밌다”고 말한다. 방구석 양조 인구의 ‘우당탕탕’ 술 이야기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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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씨(27)가 지난 3일 서울 강북구 미아동에 있는 그의 집에서 두 달 전 담근 막걸리를 보여주고 있다. 강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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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달하고 은은한…나만의 ‘뿌듯한 맛’

“처음엔 맑은 청주부터 드셔야 해요.” 씻은 쌀을 체에 밭쳐놓은 김씨가 2ℓ짜리 페트병에 담은 막걸리를 내왔다. 두 달 전 넣어둔 술이다. 상단부에는 맑은술이 떠 있고 하단부에는 생크림과 쌀뜨물을 섞어놓은 듯한 탁주가 가라앉아 있었다. 김씨는 “청주와 탁주가 섞이면 안 된다”며 윗술만 조심조심 따라냈다. 잔을 받아 한 모금 입에 머금어봤다.

의외의 향이 났다. 포도 향이었다. 기자가 “포도를 넣은 건 아니죠”라고 묻자 “포도 향 내려고 포도 넣는 건 하수”라는 농담 섞인 답이 돌아왔다. 김씨는 “술이 잘 만들어졌을 때 발효통을 열면 꼭 이런 향이 나더라”고 말했다. 달달하고도 은은한 산미가 입안에서 감돌았다. 화이트와인과 비슷한데 시중에 파는 음료수 ‘갈아 만든 배’가 연상되기도 했다.

탁주는 전혀 다른 세계다. 크림처럼 부드러운 술은 쌀이 혀끝에서 알알이 굴러가는 듯한 맛을 냈다. 동네 주점에서 4000원쯤 내고 먹는 시판 막걸리보다 훨씬 풍부하면서도 담백했다. 김씨는 “지나치게 달지 않아서 많이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씨가 쌀을 찌기 위해 일어섰다. 쌀을 찜통이나 시루에 넣어 증기로 쪄낸 밥을 고두밥(지에밥)이라고 한다. 고두밥을 지은 뒤 얇게 펼쳐 식히고, 적당량의 누룩을 섞어준 다음, 물과 함께 발효조에 담아 일주일 정도 숙성시켜야 한다. 발효가 끝나고 술지게미를 걸러내면 막걸리가 완성된다. 안정된 발효를 위해 술을 여러 단계로 나눠 담글 수도 있는데 첫 단계를 밑술, 이후 단계를 덧술이라고 한다. 덧술 작업을 몇번 하는지에 따라 이양주, 삼양주, 사양주 등이 된다.

■ 곰솥, 헬스 원판, 담요…살림살이 총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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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씨(27)가 지난 3일 서울 강북구 미아동에 있는 그의 집에서 고두밥(술을 담그기 위해 증기로 찐 밥)을 넓게 펴고 있다. 강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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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빚기 위해선 집 살림살이를 다 동원해야 했다. “전문 양조장에선 3단 피스로 된 발효통을 쓰는데 집에서는 그럴 수 없잖아요. 그래서 곰솥에 담고 집에서 헬스 하려고 산 원판을 한두 개 얹어놔요. 온도를 따뜻하게 유지해야 하니까 담요 같은 걸로도 둘러주고요.” 발효는 ‘균과의 전쟁’이기도 하다. 재료가 오염되지 않도록 고개를 돌리고 말하거나 마스크를 써야 했다. 의학 드라마 속 수술장에 들어서는 의사처럼 손을 가슴 높이로 들고 다니기도 한다.

막걸리병이 터져 집 안이 전쟁터가 된 적도 있다고 했다. “막걸리에서 탄산이 나온다는 걸 생각 못했던 거예요. (코르크 마개가 있는) 유리병에 막걸리를 담아 냉장고에 넣어뒀는데… 새벽 3시쯤이었나, ‘빵!’ 하고 터지는 소리가 들린 거죠. 냉장고 안에서 유리병 하나가 완전히 박살 나 있더라고요. 그런데 문제는 안 터진 세 병이 더 있었던 거예요. 프라이팬을 방패 삼아 조심조심 다가가서 화장실로 하나씩 옮겼어요. 폭탄제거반처럼요(웃음).”

정부 중앙부처에서 근무하는 사무관 조모씨(30)도 증류주를 만든다. 몇년 전부터 막걸리만 조금씩 빚다가 지난해엔 주종을 증류주로 바꿔 본격 양조 생활에 나섰다. 올해 초 12만원짜리 증류기도 장만했다. 그에게도 위기의 순간은 있었다. “제가 불을 낸 적이 있거든요.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증류기에서 쫄쫄 증류액이 흘러나오는 도중에 제가 기계를 잘못 건드렸어요. 순간 불이 확 올라서 가슴이 철렁했죠. 다행히 큰불로 번지진 않았지만요.”

그는 “처음 막걸리를 만들었을 때는 누룩 냄새가 너무 심하게 나서 아내가 ‘내가 너랑 사는 거냐, 누룩이랑 사는 거냐’고 말한 적도 있다”고 했다.

■사 먹는 가격의 5분의1 수준 ‘알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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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모씨(30)가 올해 초 장만한 12만원짜리 증류기. 조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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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홈브루잉(brewing)족’ 현상에는 팬데믹이 여가 활동에 미친 영향, 음주·회식 문화의 변화, 원재료값 상승에 따른 소주·맥주값 인상 등이 얽혀 있다.

조씨는 만들어 먹는 술의 장점으로 ‘적은 비용’을 꼽는다. “요즘 밖에서 술 한 번 마시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들잖아요. 만들어 먹는 게 사 먹는 것보다 무조건 싸요. 이것저것 재료를 써서 고급 사케를 만들어도 한 병당 2000원밖에 안 들어요. 사 먹는 거랑 비교하면 5분의 1 정도밖에 안 되는 거죠.” 술을 강요하지 않는 회식 문화와 최근 MZ세대 특유의 ‘절주’ 문화가 더해진 영향도 있다. 조씨는 “과거엔 소주병을 잔뜩 쌓아두고 사진 찍어 SNS에 올리는 게 유행이기도 했지만 요즘은 거의 다 사라졌다”고 했다.

김정원씨는 방구석 양조가 팬데믹 이후 현상이라고 본다. 코로나19 확산 당시 ‘홈술’을 즐기던 이들이 여러 술을 비교해 시음하거나 취향대로 만들어 먹기 시작했고, 이것이 하나의 유행으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한창 ‘홈술’ ‘홈스키’ 즐기는 사람들이 확 늘어났었잖아요. 밖에 못 나가니까 기성품을 가지고 와서 일종의 ‘DIY’(Do It Yourself·직접 만들다)를 했던 거죠. 오크통을 사다가 소주를 넣고 숙성시키는 식으로요. 사람들이 ‘술을 내 마음대로 만들어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그때 했던 것 같아요.”

따로 관계기관 허가를 받지 않고 만든 술을 ‘밀주’라고도 부른다. 관련법(조세범처벌법 제6조)에 따르면 집에서 술을 만들어 먹는 것은 합법이다. 다만 만든 술을 돈 받고 파는 건 불법이라 단속 대상이 될 수 있다. 집에서 빚은 술을 이웃에게 한 병씩 돌렸다면 원칙적으론 허용 범위를 벗어나지만 현실적으로 단속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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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모씨(30)가 최근 장만한 숙성용 오크통. 조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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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 기자 e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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