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5월 10일 국회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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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의 시간이 14일 멈췄다. 2022년 5월 10일 국회 앞마당에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를 만들겠다”며 제20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한 지 949일 만이다.
윤 대통령은 이날 국회 본회의 탄핵소추안 표결을 이틀 앞둔 지난 12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저를 탄핵하든, 수사하든 저는 이에 당당히 맞설 것”이라며 탄핵안 가결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한 태도를 드러냈다. 탄핵안 1차 표결 당일이던 7일의 ‘저자세 담화’와는 정반대였다. 새 국방부 장관 후보자를 물색하고, 대법관 후보자 임명동의를 국회에 요청하는 등 직무 수행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지만 비상계엄 선포라는 대형 사고가 출발시킨 탄핵 열차는 멈춰 세울 수 없었다.
0.73%포인트라는 간발의 차이로 대통령직에 오른 윤 대통령의 국정 운영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정치 입문 1년도 안 돼 대권을 차지한 ‘초보 정치인’이 국회에서 압도적 의석을 보유한 거대 야당을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새 정부의 간판인 초대 국무총리 인선 부터 야당 눈치를 보며 노무현 정부 마지막 총리 한덕수를 14년 만에 다시 발탁했다. 모래주머니를 차고 걷는 신세와 다름 없었다.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사실 성과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외교·안보 분야에서는 나름 점수도 땄다. 지난해 8월 열린 한·미·일 정상회의와 그 결과물인 ‘캠프 데이비드 성명’이 대표적이다. 당시 3국 정상은 “공동의 이익과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지역적 도전·도발·위협에 대해 3국이 신속하게 협의한다”고 했고, 이는 한·미·일 삼각 협력 강화의 상징이 됐다. 강제징용 해법 제시와 셔틀 외교 복원 등 한·일 관계 정상화는 한·미 동맹 강화의 지렛대가 됐다. 지난 7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때 채택한 ‘한·미 한반도 핵억제 핵작전 지침에 관한 공동 성명’ 등 핵 억지 분야에서의 성과로 이어졌다.
탈원전 정책 폐기를 통한 원전 생태계 복원, 한국수력원자력의 24조원 규모 체코 신규 원전 건설 사업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등으로 국민들의 박수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기간 동안 윤 대통령을 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차가왔다. 국정의 방향 그 자체보다 국정 운영의 방식이 주로 문제였다. 국정 최고 지도자로서 윤 대통령의 태도와 소통 방식의 문제, 인선 실패, 여권 내부의 갈등, 대통령 주변 사람들의 처신이 자주 도마에 올랐다. 지지율 침체와 여야 갈등 속에 국정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2022년 9월 미국 방문 도중 불거진 ‘바이든-날리면’ 비속어 논란은 임기 초반 윤 대통령의 이미지와 국정 동력의 약화에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국회에서 이 ××들이 승인 안 해 주면 ○○○ 쪽팔려서 어떡하나”를 두고 ○○○이 바이든이냐, 날리면이냐 논쟁이 격화했고, 상당수 국민은 대통령실의 해명을 믿지 않았다. 불신이 증폭됐다.
2023년 8월 18일(현지시간)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당시 일본 총리가 미국 워싱턴DC 인근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의를 앞두고 로렐 로지 앞에서 기념 촬영하는 모습.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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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리스크는 김건희 여사였다. 대선 후보 시절부터 논란이 됐던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사건뿐 아니라 2022년 9월 최재영 목사가 준 300만원짜리 디올백 수수 사건이 더해지면서 임기 내내 ‘김건희 리스크’가 따라다녔다.
지난 10월 15일 공개된 김 여사와 명태균씨의 카카오톡 대화 내용은 ‘명태균 사건’이 본격적으로 정치권을 덮치는 계기가 됐다. “철없이 떠드는 우리 오빠 용서해주세요”라는 문장에 등장한 ‘오빠’를 놓고 윤 대통령이냐, 김 여사의 친오빠냐 공방까지 벌어지며 국정의 품격이 현저하게 훼손됐다. 결정타는 지난 10월 31일 공개된 윤 대통령과 명씨의 통화 녹취였다. 공천 개입 의혹이 짙어지면서 지난달 7일 기자회견 때 대국민 사과까지 해야 했다.
가뜩이나 소수인 여당이 끝없는 내전 상황에 휘말리며 균열을 일으킨 것도 윤석열 정부의 위기에 큰 몫을 했다.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를 연거푸 이끈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를 ‘성상납 사건’으로 엮어 자격을 박탈시킨 게 시작이었다. 대선 승리의 밑바탕이 된 2030세대와 6070세대의 세대 연합 전선이 붕괴되면서 국정동력은 크게 약화됐다.
윤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황태자였던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의 관계는 치명적인 뇌관이었다. 갈등은 지난해 12월 한 대표가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취임한 직후부터 시작됐다. 한 대표를 비대위원장으로 중용해 놓고, 윤 대통령 스스로가 갈등을 키웠다. 김건희 여사 문제에서 시작된 둘의 갈등은 윤 대통령이 집권 후반기 새 도약의 발판을 만들기 위해 사활을 걸었던 4·10 총선의 역사적 참패로 돌아왔다. 갈등은 총선 이후에도 이어졌고, 한 대표가 여당을 접수한 뒤엔 여권의 일상적인 시한 폭탄이 됐다. 그리고 결국 탄핵소추안이 14일 국회 본회의 문턱을 넘는 결정적 이유로 작동했다.
박근혜 정부 때의 세월호 참사에 비해선 폭발력이 작았지만 159명의 생명을 앗아간 이태원 참사 역시 윤석열 정부의 큰 상처였다. 대형 참사를 겪고도 주무장관인 충암고 후배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을 경질하지 않은 건 불통 이미지를 더 고착화시켰다. 해병대원 사건을 둘러싼 은폐 의혹, 이 과정에서 불거진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의 호주대사 임명을 통한 도피 논란 등은 정권을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일 심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긴급 대국민 담화를 통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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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중엔 ‘좋은 의도’로 출발했겠지만 결과적으로 정권에 큰 부담으로 되돌아온 일도 있다.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이 특히 그런 경우다. 4·10 총선 전 첫 추진 당시엔 여론이 호응했지만, 부작용과 국민적 우려가 커지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부메랑이 됐다. 소통 강화를 목적으로 야심차게 시작한 도어스테핑(출근길 약식 문답)도 마찬가지다. 여과되지 않은 거친 태도가 국민들에게 그대로 노출되며 권위와 이미지를 스스로 실추시키는 역효과를 낳았다. “제왕적 권력의 상징인 청와대를 떠나겠다”며 추진한 대통령실 청사 이전도 각종 악재 속에 당초 의도가 전혀 부각되지 못했다. 이전 비용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더니 관저 이전 공사업체 선정 과정의 비리 의혹까지 불거졌다.
윤 대통령은 임기 동안 김건희 특검법을 포함해 모두 25차례의 법률안 재의요구권(거부권)으로 거대 야권과 갈등해 왔다. 이런 현실에 대한 극단적 반작용, 비상계엄 발령이란 이해할 수 없는 무리수는 직무 정지 상태로 자기 스스로 몰아넣는 자충수가 됐다.
허진 기자 b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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