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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 입기 부끄러워"...5.18 때 전두환에 맞선 장군들 [김종성의 '히,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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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광주 진압에 소극적이나마 저항

전두환은 12·12와 5·17이라는 두 번의 쿠데타를 거쳐 1980년 5월 31일 실질적 행정수반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상임위원장이 되고, 최규하 대통령 사임 5일 뒤인 8월 21일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의 국가원수 추대에 힘입어 8월 27일 대통령에 당선됐다.

<전두환 회고록> 제1권에서 그는 "공무원 조직을 관장하고 있던 신현확 총리나 실병력을 장악하고 있는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달리 나는 실제로는 쓸 수 있는 힘이나 수단이 없었다"며 5·18 당시의 자신은 힘이 없었노라며 '겸양'을 표시했다.

하지만 5·18을 촉발한 5·17 쿠데타 당시의 전두환은 12·12쿠데타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막강한 권력자였다. 그는 실질적으로 뿐만 아니라 형식적으로도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위에 있었다. 이 점은 5·17 한 달 전인 4월 14일부터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직한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이 겸직을 근거로 각료들의 회의에도 참석했다.

장태완처럼 맞서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전두환의 위세가 한층 고양됐던 이 시기에도 그를 거스르는 군인들이 나타났다. 정면으로 나서지는 못했지만, 소극적으로나마 전두환의 부당함을 드러내는 군인들이었다. 윤흥정 전남북 계엄분소장 겸 전투교육사령관, 정웅 제31향토보병사단장, 안종훈 군수사령관, 박춘식 육군본부 군수참모부장이 그런 군인들이었다.

12·12 때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수경사) 사령관은 전두환 쿠데타군에 상당한 압박을 줬다. 전두환 심복인 장세동 수경사 제30경비단장을 지목해 '사살 명령'을 내리기도 하고, 쿠데타 지휘부 인근으로 탱크 부대를 진격시키기도 했다. 1993년 6월 15일 자 <동아일보> 기사 '청와대 근위부대' 13편은 1979년 12월 12일의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한다.
밤 10시 반경, 독립문 부근을 나서 서대문을 거쳐 시청 앞으로 향하는 전차들의 육중한 캐터필러(바퀴 둘레의 강판 벨트) 소리가 밤의 정적을 갈랐다. 경복궁의 쿠데타 지휘부는 이 전차 구르는 소리에 아연실색했다.

전방 9사단에 있지 않고 30경비단에 있었던 노태우 9사단장도 두려움에 떨었다. 위 기사는 "30경비단 본부를 지키는 노태우 9사단장은 등골이 오싹했다"라며 "장태완이가 정말 탱크를 앞세워 쳐들어오는구나", "우리는 모두 불법 하극상 세력으로 체포되고 마는구나"라고 두려워했다고 말한다.

윤흥정·정웅·안종훈·박춘식 장군은 장태완처럼 맞서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들의 행동 역시 상당한 신념과 용기를 필요로 했다.

전두환은 12·12 때는 반란군 수장이었지만, 5·17 및 5·18 때는 정부군 수장이었다. 그래서 1980년 5월에는 전두환의 쿠데타에 대항하는 게 쿠데타였다. 적어도 법적으로는 전두환에게 맞서는 게 불법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들의 행동은 상당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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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금남로에서 광주시민들과 계엄군이 대치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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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흥정] 발포 허용 요청 거부

5·18 초기 진압을 맡은 윤흥정 전남북 계엄분소장은 소극적 진압을 펼쳐 전두환의 미움을 샀다. 1988년 12월 7일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광주특위)의 청문회에 출석한 윤흥정은 '광주 시위는 경찰력으로도 막을 수 있었다'는 생각을 드러냈다. 이런 소신에 따라 그는 하급 부대의 발포 허용 요청을 거부하고, 강경 진압을 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1988년 12월 8일 자 <동아일보> 5면에 실린 청문회 회의록에 따르면, 그의 증언은 이랬다.
18일 진압작전이 원만하게 전개됐다는 보고를 받은 후, 이날 밤 도처에서 '사람을 개 패듯 하면 되느냐'는 항의 전화를 받았다. 19일 대책회의에서 기관장으로부터 군복 입기조차 부끄러운 얘기를 들어, 향후 그런 일이 일체 없도록 군에 지시했다.

군복 입기조차 부끄러웠다고 했다. 전두환은 그런 그의 군복을 강제로 벗겼다. 시민군이 도청을 접수하는 21일에 그를 체신부 장관에 임명하더니 다음날 전역시켰다. 작전이 진행 중일 때 '장수 교체'를 단행하는 이례적인 행동을 보였던 것이다.

평화민주당(평민당) 소속인 최봉구 의원이 "원해서 예편했는가?"라고 묻자, 그런 상황에서 예편을 원할 군인이 있겠느냐고 윤흥정은 반문했다. 체신부 장관으로 '영전'된 게 아니라, 예비역으로 '추방'된 것이다.

[정웅] "그렇게는 못한다"

유사시에 전남·광주를 지킬 책무를 가진 제31사단 정웅은 유사시인 5·18 때 전두환으로부터 소극적으로나마 임지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전두환·노태우 구속 뒤인 1996년 7월 25일의 12·12 및 5·17 사건 제24차 공판에 출석한 그는 5·18 당시에 전두환 일파인 황영시 육군참모차장의 전화를 받고 어이가 없었다고 증언했다.
황영시 육본차장은 유선으로 '무장 헬기 등을 동원, 버스를 공격하라'는 등 강경 유혈진압을 지시했는데, 하도 어이가 없어 '그렇게는 못한다'고 거부했습니다.

'하도 어이가 없다'는 속마음을 그는 억누르지 않았다. 무장 헬기로 시민들의 버스를 공격하라는 지시는 전남·광주를 지키는 사단장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범죄였다. 그래서 "그렇게는 못합니다"라고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그는 경찰력만으로도 시위 진압이 가능하다며 상부에 맞섰다. 결국 6월 4일 사단장 직에서 해임되고 대기발령을 받았다. 9월 30일, 예비역 육군 소장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안종훈] "국민의 동의 받아야 한다"

안종훈 군수사령관은 다른 방식으로 맞섰다. 신군부가 군부의 지지를 도출 혹은 조작하는 도구로 활용했던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자기 소신을 명확히 드러냈다.

5·18 전날인 17일에 신군부가 국회를 무력화시키고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시키려 하자, 안종훈 사령관은 '국민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며 제동을 걸었다. 1996년 1월 24일 자 언론들에 공개된 약칭 '5·17 및 5·18 사건 공소장'에서 검찰은 17일 오전 10시경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보여준 안종훈의 태도를 이렇게 설명했다. 문장이 너무 길어서 두 단락으로 나누었다.
육·해·공군 주요 지휘관 43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열어 (중략) 계엄하에서 학원소요가 진정되기는커녕 오히려 과열·폭력화되어 가고 있고 북한의 동향도 심상치 않으므로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하고자 하니 의견을 개진해 달라고 하고,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계엄확대에 이견이 없다는 발언을 한 가운데,

안종훈 육군군수사령관이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는 국민의 합의에 의해 하여야 하는데 시기상조라며 반대 의견을 표명하자, 정호용은 사회안정을 위하여 군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필요하다는 요지의 주장을 하고, 피고인 노태우, 같은 (피고인인) 황영시도 그에 동조하는 발언을 하는 등으로 참석자들의 발언이 끝나자, 피고인 주영복은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전군 주요지휘관들의 의견으로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로 결론을 내리고

'국민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발언은 원론적이고 당연하지만, 이런 언급은 민주주의를 경시하고 그에 둔감한 전두환 신군부의 본질적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민주적 소양의 결핍을 일깨우는 발언이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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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 제일은행(현재 무등빌딩) 앞에서 최루탄이 터진 상황에서 한 시민이 방독면을 쓴 계엄군에 둘러 싸여 겁에 질린 모습을 하고 있다. ⓒ 나경택 촬영, 5.18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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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식] "나 하나 죽어 유혈 사태 막을 수 있다면"

박춘식 군수참모부장은 호소의 방법으로 맞섰다. 1980년 5월 23일 보안사령부 제701보안부대장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제출한 '광주사태 소탕작전 회의동정'이란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현장에 뛰어들어 시민들을 설득할 테니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육군참모총장, 참모차장, 계엄사 참모장, 2군 사령관 등이 참석한 회의석상에서, 그는 자신을 광주로 파견해주면 시민들을 만나 귀가를 설득하고 그들과 폭도들을 분리시키겠다고 말했다. 고향 사람으로서 광주가 피바다가 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으며, 자기 하나가 죽어 유혈 사태를 막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영광은 없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신군부가 좋아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속마음을 드러냈던 것이다.

윤흥정·정웅·안종훈·박춘식은 장태완처럼 용감히 맞서지는 못했다. 사실, 그럴 만한 여건도 아니었다. 그런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방법으로 5·17 쿠데타 및 5·18 학살에 맞섰다. 정면으로 대항하지는 못했지만, 간접적으로나마 전두환을 거스르는 소신을 보여준 것이다.

전두환은 역사를 거슬렀지만, 그들은 전두환을 거슬렀다. 엄격한 상명하복 체계에서, 또 전두환 일파가 정부군 지위를 가진 상태에서 전두환을 거스르는 군인들이 나왔다. 전두환 신군부의 죄악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김종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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