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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전투화' 신은 채 숨진 무명 용사... 아직 13만명이 못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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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7사단 예하 왕자포병대대 장병들이 4월 29일 강원 화천 일대에서 수습된 6·25 전사자 유해에 예를 갖추고 있다. 육군 7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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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71년 전 아마 조국을 지키기 위해 주저 없이 전쟁터로 나갔을 게다. 그러다 전투 중 숨져 강원도의 깊은 산속에서 긴 시간 고이 잠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가 돌아왔다. 22일 강원 양구군 대우산 1110고지에서 70년 만에 햇빛을 본 그를 만났다. 그는 누구일까, 또 그에게는 당시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걸까.

15일 6ㆍ25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 사전 작업을 하던 육군 공병부대의 지뢰탐지기가 별안간 ‘삑삑’ 요란한 소리를 냈다. 땅속 어딘가에 금속 물질이 있다는 뜻이다. 6ㆍ25 참전용사일 가능성이 컸다. 곧장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 정보가 전해졌고, 본격 발굴이 시작됐다.

현장에 도착한 발굴감식단은 ‘접근금지 구역’임을 알리는 가로ㆍ세로 각 2m의 울타리를 쳤다. 유해가 훼손되는 걸 막으려는 조치다. 호미 등으로 조심스레 땅을 파내려 가자 얼마 후 흙더미에서 종아리뼈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사를 추정케 하는 탄피 몇 점도 함께 발견됐다. 발굴 현장에서 만난 신영순 감식관은 “뼈 형태로 볼 때 전투화를 신은 상태로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전사자가 착용했을 전투화는 이튿날(23일) 발굴됐다. 흙더미에 쌓여 형체만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미군 전투화였다고 한다. 탐지기가 반응했던 것도 미군 전투화에 박혀 있는 금속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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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강원 양구 대우산 일대에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감식관과 발굴병사들이 6·25 전쟁 전사자 유해를 조심스럽게 수습하고 있다. 이곳은 1951년 7월 8일부터 31일까지 24일간 대우산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양구=정승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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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용사는 왜 미군 전투화를 신었나


혹시 숨진 이가 미군은 아니었을까. 군 당국은 일단 국군일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다. 육안으로 봤을 때 골격이 한국인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전사(戰史)도 그를 국군 용사로 지목하고 있다. 대우산은 6ㆍ25전쟁의 대표 격전지였다. 1951년 7월 7일 유엔군은 북측을 휴전회담장으로 복귀시키기 위해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던 대우산에 대대적 공세를 폈다. 인근 도솔산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무적 해병’이란 별칭을 얻은 해병대 1연대와 미군 2사단, 네덜란드 대대가 힘을 모았다.

당시 전투 상황은 전사자가 국군일 개연성에 힘을 보탠다. 해병대 관계자는 “6ㆍ25가 갑자기 터진 탓에 전쟁 초기 자체적인 물자 확보에 상당한 애를 먹었다”며 “참전한 해병대원 대다수는 1950년 제주도에서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했는데, 당시 미 해병대로부터 군복과 장구류 등 복식을 그대로 받았다”고 설명했다. 곧바로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에 투입된 해병대원들은 이후 동부전선으로 차출됐다. 역사의 조각을 하나로 이으면 다리뼈의 주인공은 해병대원이고, 미 해병대의 전투복과 전투화를 착용했을 거란 결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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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6·25 전사자 유해 발굴 과정에서 수습한 미군 전투화. 23일 발굴된 무명 용사가 신었던 전투화와 동일 기종이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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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기서 생을 마감했다. 전투는 치열했다. 같은 달 30일까지 장장 24일 동안 양측은 총력전으로 임했다. 하루 수만 발의 포탄이 오가 능선과 고지의 나무를 죄다 불태워 버릴 정도였다. 북한군은 대우산 우측1,000m 이상의 고지를 각각 ‘김일성 고지’, ‘모택동 고지’로 명명하며 탈환 의지를 다졌다.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개시됐지만, 휴전선이 그어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사상자는 아군에서만 946명이 나왔다. 이런 지옥에서 그도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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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강원 양구 대우산 일대에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감식관과 발굴병사들이 6·25 전쟁 전사자 유해를 조심스럽게 수습하고 있다. 양구=정승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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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유해 발굴에 70년이나 걸렸나


기쁨은 잠시였다. 그는 완전히 귀환하지 않았다. 앙상한 뼈대만 우리에게 돌아왔다. 이름도, 나이도, 고향도 모른다. 인식표(군번줄)처럼 신원을 유추할 수 있는 유품 역시 전혀 없다. 유전자(DNA)를 채취해 가족 품에 안기기 전까지 그는 ‘무명(無名) 용사’다. 6ㆍ25 전쟁 전사자(실종자 포함)는 16만2,394명. 그러나 유해가 수습돼 국립묘지에 안장된 이는 2만9,202명에 불과하다. 20%도 채 되지 않는다. 13만이 넘는, 숭고한 희생들이 여전히 이름 모를 산야에 묻혀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소리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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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육군50보병사단 예비군지휘관들이 23일 경북 의성군 안평, 비안면 지역에서 전사자 유가족의 유전자 시료를 채취하고 있다. 육군 50보병사단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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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유해 발굴은 정전(1953년 7월 27일)에서 50년이 훌쩍 흐른 2000년 시작됐다. 원래 전쟁 발발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한시적 사업이었지만, 정부는 2003년 발굴을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사업 주체도 2007년 육군본부에서 국방부로 격상됐다. 국방부 관계자는 “전쟁이 끝난 뒤 먹고살기도 힘들다 보니 조국의 부름에 기꺼이 응해 목숨을 바친 전사자들을 제때 예우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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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전 용사 유해 발굴 현황. 그래픽=박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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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을 완료하는 일은 쉽지 않다. 반세기가 지난 데다 유해가 나와도 가족 찾기는 더욱 어렵다. 워낙 오랜 시간이 흘러 부모나 배우자, 형제자매가 세상을 떠난 경우가 부지기수다. 실제 지금까지 국군 전사자 유해 1만942위가 확보됐지만, 가족이 확인된 사례는 165건에 그치고 있다. 감식단 관계자는 “인식표가 같이 발굴돼 35일 만에 가족을 찾은 사례도 있다”면서 “하지만 대개 유해와 가족이 연결되기까지 10년은 족히 걸려 DNA 시료 채취 확보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감식단이 보유한 유가족 DNA 시료는 4만7,000여 건뿐이다. 무명의 해병대원 역시 지난한 시간을 더 견뎌야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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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강원 양구 대우산 일대에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감식관과 발굴병사들이 6·25 전쟁 전사자 유해를 찾기 위해 1차 발굴을 하고 있다. 양구=정승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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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투성이지만 고고학, 인류체질학, 역사학 전공자 등으로 구성된 감식단은 12개 팀으로 나뉘어 전국 곳곳의 산을 누비는 중이다. 감식단원들은 발굴 현장에 항상 태극기를 걸어둔다. 이어지는 경례와 묵념, “그들을 조국 품으로”라는 구호를 외친 뒤에야 발굴에 들어간다. 한정희 유해발굴팀장은 “선배 전우님들의 고귀한 죽음을 기리고 늦은 만큼 꼭 유해를 찾아서 가족 품에 돌려보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강조했다.



양구= 정승임 기자 cho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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