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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진의 차이나는 차이나] 대등한 외교 상징이던 주중 공관…당당한 외교 기억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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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진, 워싱턴 앞선 조선 첫 해외공관

기록 없어 정확한 위치 고증 어려워

고종이 15만원에 베이징 공관 구입

“수교 30년 계기 표지부터 설치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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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진 베이징총국장


# 톈진 자죽림 공관

톈진(天津)시 중심가 해방북로와 하이허(海河) 사이 자죽림(紫竹林) 교회당을 지난 17일 찾았다. 입구 안내판의 QR 코드를 스캔했다. 자죽림 지명 유래가 흘러나온다. 인근에 사찰 터가 있었다고 한다.

이 절터가 한국 최초의 근대적 해외 공관인 톈진 공관의 자리다.(『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가다』) 1882년 임오군란 뒤 조선이 청(淸)과 톈진에서 맺은 불평등 통상조약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산물이다. 청 역시 상무위원 진수당(陳樹棠)을 서울에 파견했다. 지금의 명동 땅 6500평을 2000냥에 샀다. 현 중국 대사관터다.

조선은 베이징이 아닌 톈진으로 갔다. 사신으로 청에 머물던 김윤식이 나섰다.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의 막료 주복(周馥)이 자죽림터를 제시했다. 땅과 수리비로 은 4000냥을 국고에서 지불했다. 방 22칸, 복도 4칸으로 된 기와 건물이었다. 1884년 4월 공관장인 주진독리(駐津督理) 남정철이 부임했다. 그의 월급이 50냥이던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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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중국 톈진(天津)시 해방북로와 하이허(海河) 사이의 자죽림 교회당에서 중국인 부부가 결혼식을 올리고 있다. 인근 자죽림 절터에 1884~95년 조선의 첫 해외 상주 공관인 톈진 공관이 자리했다(사진 1). 신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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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진 공관 가동은 1891년 워싱턴 공사관 구매에 앞선다. “본 관청은 본국 (해외) 상주 외교 사절의 시초이다.” 규장각 외교문서 『주진독리공서장정저고(駐津督理公署章程底稿·1883)』는 서문에 조선 최초의 해외 공관이라고 적시했다. “명목은 다르지만 체제는 같다”라고도 했다. 당시 톈진에 주재한 열강의 영사관과 같다는 의미다. 자죽림 공관은 11년간 운영됐다.

다시 17일. 자죽림 교회당 블록 모퉁이 르네상스 양식의, 일제 시절 있었던 조선은행 건물에 들어갔다. 경비원은 “톈진시 교통운수위원회 사무실”이라며 “조선은행 흔적은 없다”고 했다. 손성욱 선문대 교수는 “톈진 공관은 위치 기록이 없어 현재 정확한 장소를 특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 베이징 동교민항 공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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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세워진 베이징시 동교민항 34호의 프랑스 인도차이나 은행 건물이다. 옛 대한제국의 공사관 자리다(사진 2). 신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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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베이징 천안문 광장과 맞닿은 골목인 동교민항(東交民巷)을 찾았다. 이 골목이 청말 열강의 외교 단지를 동서로 관통했다. 베이징 경찰박물관(36호) 옆 베이징 공안국 부속 건물(34호)을 살폈다. 프랑스 인도차이나 은행(東方匯理銀行·동방회리은행) 건물이다. 1917년 세워진 절충주의 양식의 3층 붉은 벽돌 건물이지만 들어갈 수 없었다.

아쉽지만 인접한 옛 미국 시티(花旗)은행, 현 경찰박물관을 관람했다. 두 건물은 청말 베이징 내성의 남쪽 성벽과 맞닿았던 미국 대사관 터에 세웠다. 34호 터가 바로 중국과 한반도의 조공·책봉 관계가 사라지고 제도(帝都) 베이징에 처음으로 들어섰던 대한제국 공사관 자리다.

청은 1894년 한반도에서 벌인 청일전쟁에서 졌다. 패전으로 조선과 사대(事大) 관계가 끝났다. 1897년 대한제국이 들어섰다. 1899년엔 청과 ‘한청통상조약’을 맺었다. 대등한 외교 조약이었다. 2항에 상호 외교 관원 파견을 규정했다. 1899년 반(反) 외세를 내건 의화단 운동으로 베이징은 혼란에 빠졌다. 이듬해 8국 연합군(영국·미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일본·오스트리아·러시아)이 진주했다. 주청 공사 파견을 늦췄다. 1901년 고종은 미국 주청 공사의 3층 건물을 공관으로 사들였다.

박제순 주청 공사가 1903년 4월 공사관에 입주했다. 고종의 내탕금(內帑金·황제 통치자금) 15만원이 들어갔다. 박 공사는 톈진 주진독리를 역임했다. 청 조공국 가운데 베이징 공사관은 대한제국이 유일했다.

당시 공사관 지도(사진③)가 규장각에 전한다. 네 개 건물이 자리했다. 1번 ‘아파트/호텔 뒤 미니스테’ 건물이 베이징 공관이다.

베이징 공관은 톈진 공관과도 연결된다. 손성욱 교수는 “1900년 의화단 운동 당시 일본 헌병대가 톈진 공관에 난입해 건물을 훼손했다”며 “박제순이 1903년 주청공사로 부임한 뒤 일본에 배상금을 받아 부족한 베이징 공관 운영 자금으로 사용했다”고 말한다. 톈진 공관의 소유권이 조선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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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청대한공사관지도’. 로마자 1번 건물이 베이징 공사관이다(사진 3). [사진 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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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명동과 달리 베이징 동교민항 공사관의 운명은 기구했다. 1905년 11월 일본과 맺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됐다. 공관의 존립 근거가 사라졌다. 고종은 당시 프랑스 회사와 베이징 공관을 담보로 금전 관계를 맺었다. 공관은 일본 정부를 거쳐 프랑스 인도차이나 은행에 매각됐다.

지금은 동교민항 어디에도 공사관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담장에 붙은 ‘동교민항 34호’ 표지판이 전부다. 베이징과 톈진 공관은 1992년 한·중 수교 교섭에서도 거론되지 않았다. 교섭에 나섰던 권병현 제4대 주중대사는 “동교민항에 있던 공관이 복잡한 과정을 거쳐 역사의 망각 속으로 사라진 것을 뒤늦게 알았다”고 전해왔다.

두 공관의 역사적 가치는 크다. 과거 대등한 한·중 외교의 상징이다. 손성욱 교수는 “대한제국은 베이징 공사관을 세워, 공간적으로 대등한 주권 국가 관계를 재차 확인했다”며 “과거 상국(上國)의 수도에 동등한 관계를 나타낸 상징적 건물이었다”고 평가한다.

공관을 기억하려는 움직임도 시작됐다. 올 3·1절 102주년 기념 베이징 독립운동 사진전에서다. 홍성림 재중화북항일역사기념사업회 이사는 “내년 수교 30주년을 계기로 베이징과 톈진 공관 부지에 안내 표지를 세워야 한다”며 “구한말 중국과 당당한 외교를 펼쳤던 현장을 기억하려는 당국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베이징·톈진=신경진 특파원 shin.kyung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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