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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용·중재의 ‘무티 리더십’으로 위기의 유럽 구한 장수 총리 메르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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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16년 만에 정계 은퇴…막 내리는 메르켈 시대

[경향신문]

임기 중 당리당략보다 정책 실용성 내세워 시민 지지 ‘탄탄’
탈원전 추진 선언·최저임금 등 야당과 협치로 존재감 뚜렷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67)의 16년 집권이 그의 후임이 결정되는 26일(현지시간) 총선 후 막을 내린다. 메르켈 총리가 걷는 길은 모두 새로운 역사였다. 그는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동독·과학자 출신 총리였고, 이제 헬무트 콜 전 총리와 더불어 독일 최장수 총리가 됐다. 51세에 역대 최연소 나이로 취임했으며 독일 역사상 자발적으로 퇴장한 첫 총리이기도 하다.

메르켈 총리는 11년간 재임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에 이어 역사적인 여성 국가 지도자로도 평가받고 있다. 당리당략보다는 정책의 실용성에 집중하며 나라를 이끌어 임기 후반까지도 시민들의 탄탄한 지지를 받고 있다.

■ 동독 출신 과학자, 기민당 대표로

메르켈 총리는 독일이 둘로 갈라져 있던 1954년 서독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메르켈 총리가 태어난 지 몇주 지나지 않아 동독 브란덴부르크로 이사했다. 메르켈 총리의 부친 앙겔라 카스너 목사의 목회를 위해서였다. 사회주의 사회였던 동독에서 그가 보수 성향의 기독교민주연합(기민당)에 들어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의 부모는 자녀들에게 사회주의의 획일적 이념교육으로부터 벗어나고,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법을 훈련시켰다.

메르켈 총리가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것도 “(자연과학에 대한) 진실은 쉽게 왜곡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종종 과학 원리를 정치 용어로 활용했다. ‘정치에도 물리법칙이 적용되냐’는 기자의 질문에 “질량이 없으면 깊이도 없다”며 ‘중력의 법칙’을 언급하기도 했다.

메르켈 총리는 1990년 독일 통일 후 헬무트 콜 총리의 발탁으로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 뒤 ‘콜의 양녀’로 불리며 1991년 여성청소년부 장관, 1994년 환경부 장관을 지냈다. 기민당 사무총장직을 거쳐 2000년 당시 야당이었던 기민당의 첫 여성 대표로 선출됐다. 이후 2005년 사회민주당(사민당)과의 대연정에 성공하며 독일 총리로 취임하면서 15년간 초고속 성공 가도를 달렸다.

경향신문

■ 대처와 비교되는 무티 리더십

임기 동안 독일과 유럽연합(EU)의 위기를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은 메르켈 총리는 포용과 중재를 통해 ‘무티(Mutti·엄마) 리더십’을 발휘해왔다. 메르켈 총리의 실용주의와 포용성은 그가 장기집권할 수 있었던 이유이자 ‘철의 여인’이라 불리는 대처 전 영국 총리와 뚜렷이 비교되는 부분이다.

매트 포트러프 영국 코벤트리대학교 정치과학과 교수는 메르켈 총리가 당리에 따라 움직이는 정치판을 정책 토론의 장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실제 메르켈 총리는 합리적이라고 판단하면 야당 정책도 수용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일어난 2011년에는 사민당의 탈원전 의제를 수용해 2022년까지 탈원전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2010년 모병제 전환, 2014년 연금수령 나이 하향, 2015년 최저임금 법제화 등도 야당의 정책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수년간 지속된 내전으로 2015년 시리아 난민들이 대거 유럽으로 넘어왔을 때 메르켈 총리는 100만명에 달하는 난민 수용을 결정했다. 유럽국들이 난민 유입을 막기 위해 애쓰고 있는 상황에서 독일은 난민 유입의 보루가 됐다. 메르켈 총리는 당시 “전쟁으로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을 우리가 국경에서 거부한다면 독일은 더 이상 나의 조국이 아니다”라고 연설했다. 하지만 독일 내부 여론은 좋지 않았고 여당의 지지율은 하락했다. 이는 2017년 총선에서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제3당으로 연방의회에 입성할 수 있었던 계기로 작용했다.

메르켈 총리의 임기 말 최대 과제는 코로나19 대유행 극복이었다. 그는 대규모 예산 편성에 반대하는 EU 정상들을 일일이 설득해 7500억유로 규모의 코로나19 경제회복기금 합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 중국·러시아도 손잡은 실용 외교

메르켈 총리는 재임 초기 아프가니스탄전쟁과 이라크전쟁을 지지하며 미국과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고, EU와 무역전쟁을 일으킨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와 충돌하면서 점점 미국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2017년 3선에 도전했던 메르켈 총리는 “우리(독일과 유럽)가 (미국 등) 다른 나라들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시대는 지나갔다”며 유럽의 독자 노선을 강화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메르켈 총리는 중국과 손을 잡았다. 재임기간 동안 13차례 중국을 방문한 그는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 때도 재계 인사들을 이끌고 방중해 경협을 논의했다. 미국이 중국 기업 화웨이의 통신장비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다른 나라들에 압박을 가했을 때 독일은 화웨이 사용을 허용했다.

메르켈 총리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는 서로 으르렁대면서도 필요할 때면 협력했다. 메르켈 총리는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의 구금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탈원전 정책에 따른 천연 에너지 조달을 위해 러시아와 독일을 연결하는 노드스트림2 가스관 사업은 꿋꿋이 진행했다. 메르켈 총리는 유대인들에게는 항상 고개를 숙였다. 독일 정치인들이 지지율 하락을 우려해 방문하기를 꺼렸던 다하우 강제수용소에도 총리 중 최초로 찾아가 참배했다. 메르켈 총리는 홀로코스트라는 말 대신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쇼아(재앙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를 쓰는 등 단어 선택에도 신경썼다. 그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해방 70주년 기념식에서 “나치 만행을 되새겨 기억하는 것은 독일인의 영원한 책임”이라고 말했다.

■ 가장 신뢰하는 세계 정치 지도자

‘메르켈 마름모(Die Merkel-Raute)’는 메르켈 총리가 카메라 앞에 설 때 양손을 마름모 모양으로 모으고 있는 모습에서 유래했다. 그는 과거 “팔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손을 모으고 있다”면서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후 ‘메르켈 마름모’ 또는 ‘메르켈 다이아몬드’로 불리는 특유의 손동작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여겨졌다. 이번 총선에서 사민당 총리 후보인 올라프 숄츠 부총리 겸 재무장관도 독일 매체와 인터뷰하면서 메르켈 마름모 손 모습을 취했다.

메르켈 총리는 특유의 과묵함 때문에 “메르켈하다(merkeln)”라는 유행어까지 만들어냈다. ‘중요한 사안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지나치게 신중한 태도를 비꼬는 데서 탄생했지만, 이는 메르켈 총리의 성공 이유로 꼽히기도 한다. 독일 언론인 슈테판 코르넬리우스는 이를 두고 메르켈 총리가 상황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계획을 세운 뒤 대응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해왔다고 분석했다.

메르켈은 계파정치를 탈피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로 평가된다. 성과가 없거나, 비위에 휩싸인 고위직 인사들에 대해 눈을 감지 않았다. 메르켈 총리는 자신을 정치인으로 대성하도록 도와준 콜 총리가 1999년 비리 의혹에 휩싸이자 바로 “콜로 인해 일어난 사건이 기민당에 큰 피해를 입혔다”는 성명을 내놓았고 끝내 콜은 사임했다.

메르켈 총리는 퇴임 이후 정치활동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그에 대한 지지율은 여전히 높다. 지난달 독일 공영방송 ARD 여론조사 결과 메르켈 총리 시대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응답은 75%에 달했다. 퓨리서치센터가 지난 22일 공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16개 부유국 시민들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74%)이나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61%),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20%) 등보다 메르켈 총리(77%)를 가장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윤기은·이윤정 기자 energy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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