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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친에게 위치 추적 당하는 여성에게 이 질문은 틀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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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교제살인으로 죽은 여성 108명 '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

몇 년 전 친구로부터 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집착이 심한 남자친구에게 구속을 당하던 끝에 GPS로 위치 추적을 당한다는 한 여성을. 남자친구의 감시를 나름대로 피하기 위해서 GPS가 잘 터지지 않는 지하철을 타고 뱅글뱅글 돌고 있다는 여성을.

'왜 그 여자는 남자친구와 헤어지지 않을까?'

그것이 당시 내 머릿속에 떠오른 물음이었다. 순간 나는 친구에게 질문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것이 여성에게 잘못을 지우려는 부당한 말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물음은 주어부터 잘못돼 있었다. 이 질문은 이렇게 돼야 보다 정확한 것이었다.

'명백한 교제폭력을 저지른 그 남자는 왜 처벌받지 않을까?'

질문의 주어를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바꾸면 그때서야 구조적인 해결책이 보인다. 질문의 주어가 여성이면 영원히 '망한연애'를 하는 피해자 탓을 하게 된다. 그 여성이 목숨을 잃는 순간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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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이주연·이정환 저) 표지 이미지 ⓒ 오마이북



책 <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는 질문의 주어를 바꾼다. 대신 가해자인 남성의 처벌 가능성을 묻는다. 우리 사회는 여성들이 '교제살인'을 당하지 않게끔 해결책이 마련되어 있나?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지하철을 빙빙 돌고 있다는 그 여성이 생각났다. 이름도 얼굴도 사는 곳도 모르는 그 여성의 안부가 다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교제살인'이라는 단어의 시작
우리는 '데이트'라는 서정적 단어를 지우고 이 죽음을 '교제살인'이라 부르기로 했다.

오마이뉴스 독립편집부 '이음'의 이주연·이정환 기자가 지난 2020년 11월 '교제살인'이라는 기획을 시작했다. 이들은 지난 2016년부터 2018년까지 교제살인으로 인해 사망한 여성들에 대한 108건의 판결문을 분석해 14건의 기사로 내놓았다. 그리고 '데이트폭력'이라는 말 대신에 '교제폭력' 혹은 '교제살인'이라는 말을 쓰자고 제안했다.

이 책을 쓴 이주연 기자에게 '교제살인' 기획을 시작하고 나서 가장 큰 변화를 물었다. "사람들이 교제살인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라는 말이 나왔다. 오마이뉴스를 비롯해 여성신문 또한 '데이트폭력'을 대신해 '교제살인'이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점차 댓글창에서도 '데이트폭력'을 대신해 '교제살인'이라는 단어를 쓰자는 의견이 보이기 시작한다.

단어는 인식을 재구성한다. 우리는 '몰카'가 '불법촬영'이 되기까지 이미 수많은 여성들의 투쟁이 있었음을 알고 있다. 그 결과 지하철을 비롯한 공공장소에서 "'몰카'에 조심하라"는 말 대신 "불법촬영은 범죄"라는 정확한 문장을 쓰이게 됐다. '동반자살'을 대체하는 '가족살해' 같은 단어도 마찬가지다.

10개월 뒤에 이 기획 기사에 살을 붙여 책 <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가 지난 9월 10일 나왔다. 이 책의 부제는 '교제살인, 그 108명의 죽음'이다.

왜 헤어지지 않는가?
오마이뉴스

▲ 이들은 자신의 '의지'만으로 '안전이별'을 할 수 없다 ⓒ elements.env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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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가 사는 집을 알고 있다.
그는 내 차를 알고 있다.
그는 내 직장을 알고 있다.
그는 내가 몇 시에 출근해서 몇 시에 퇴근하는지 알고 있다.
그는 내 친구가 운영하는 카페를 알고 있다.
그는 내 친구의 연락처를 알고 있다.
그는 내 가족을 알고 있다.
내가 숨을 곳은 없다는 말이다. - 23쪽

일반적으로 교제폭력을 당한 여성들에게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질문은 거의 유일하다. '왜 헤어지지 않는가.' 가장 친밀했던 상대가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이 됐다는 걸 아마 그들과 교제하는 여성들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가해자는 피해자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이 가해자로부터 벗어나려면 사실상 모든 삶의 기반을 포기해야 한다. 이미 이들은 자신의 '의지'만으로 '안전이별'을 할 수 없다. 책에 등장한 한 판결문의 사례를 보면 이는 더 분명해진다.

2017년 7월부터 가해자 남성이 여성을 살해하기 전까지 그녀를 폭행해 형사 입건된 횟수는 무려 9건이다. 과연 이 상황에서 이 피해 여성이 마주친 한국의 '치안'과 '경찰력'이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진 단어들이었을까.

몇 차례나 걸친 형사 입건 횟수에도 폭력은 계속됐고 2018년 3월에는 경찰이 가해자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하지만 피해자가 탄원서를 제출해 재판부가 청구된 영장을 기각한다. 그로부터 45일 뒤 여자는 칼에 찔려 사망한다.
그런데도 일부 사람들은 처벌불원, 즉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원하지 않았다는 그 상황만을 보고 "죽을 짓을 했다"거나 "어리석은 여자가 문제"라고 함부로 넘겨짚고 비난했다. 그들은 가해자에게 손가락질하지 않았고 경찰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교제폭력 피해자들에게 더해지는 이와 같은 '피해자 책임론'은 또 다른 공포다. 이런 인식이 '직무유기'가 지속되게 만든다. - 113쪽

만약 이 여성이 죽기 전으로 시간이 거꾸로 돌아간다고 해서 현재 한국 사회가 과연 이 여성을 다시 살릴 수 있는가? 또한 피해 여성을 살해한 남성들은 재판에서 납득 가능한 죗값을 치를 수 있을까? 책의 저자들은 질문에 모두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18건의 상해·폭행치사 사건 가운데 동일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의 상습적 폭행이 명시된 사건은 6건에 달한다. 피고인들은 피해 여성을 지속적으로 때려왔고, 그랬기에 죽을 줄 몰랐다고 주장했다. 그 폭행의 끝은 일방의 죽음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의 평균 죗값은 5.4년이다. - 148쪽

통계가 없다

한국에는 여성폭력에 대한 공식적인 통계가 없다. 책 <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의 저자들은 '교제살인' 108건의 판결문을 직접 찾아나서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108건이라는 숫자는 모든 피해 사례를 정리한 정확한 숫자가 될 수 없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같은 기간인 2016년부터 2018년까지 '교제살인'으로 사망한 여성의 숫자는 51명이다.
51과 108. 이 숫자들이 가리키는 진실은 하나다. '최소한'의 숫자라는 것이다. 108명보다 훨씬 더 많은 여성들이 남성과 사귀다가 죽임을 당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이 죽음을 제대로 짚어낼 공식적인 숫자조차 없다는 것, 이것이 진실이다. - 45쪽

이들은 두 달 동안 연인, 교제, 데이트, 여자친구 등 101개의 검색 키워드를 조합해서 나온 판결문 중에 '교제살인'이라고 볼 수 있는 판결문을 한 줄 한 줄 읽어가면서 찾아낼 수밖에 없었다.

교제살인으로 몇 명이나 죽었는지 국가조차도 정확하게 알 수가 없으니 대책을 세울 수도 없다. 물론 길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다만 문제는 길을 만드려는 노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저자들은 미국 미네소타주에서 한국의 '교제살인'을 해결할 수 있는 단초를 찾아내기도 한다.

'덜루스 모델'의 시초가 된 미국 미네소타주 도시 덜루스에서는 현재 가해자가 폭력을 휘두르면 72시간 동안 구속된다. 여기에 더해 가해자가 과거에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살피는 소위 '위험성 평가'가 실시된다. 그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주거와 고용 등을 돕기도 한다. 피해자가 완전히 가해자로부터 분리되고 독립해서 설 수 있도록 만드는 장치이다.

책의 저자들은 말한다. ""신고할 테면 해봐라. 죽여버리겠다"고 했던 그 남자, "너는 보이면 진짜 간다"고 협박했던 그 남자, "완전 망가뜨린다"고 문자를 보냈던 그 남자들이 만약 덜루스에 있었다면 모두 즉시 체포되었을 것이다"라고. "그 남자들에게 끝내 죽임을 당한 여자들이 덜루스에 있었다면 지금 살아 있을 것이 분명하다"(187쪽)고.

또한 저자들은 판결문을 분석하고 '교제살인' 문제를 제기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덜루스 모델을 한국 113개 지자체에 도입할 것을 공식적으로 건의하기도 했다. 그에 대한 지자체의 답변은 어땠을까? 책 <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유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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