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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현실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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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고려 말 가장 큰 개혁 과제도 경제, 즉 먹고사는 문제였다. 당시는 농업이 기간산업이었고 경작지 관련 폐단이 가장 큰 문제였다. 가장 적나라한 폐단은 권력을 가진 지배층 일부가 토지문서를 위조해서 남의 땅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물론 왕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권력자들이 기존 권력자들을 밀어내고 등장했다. 그런데 이렇게 밀려난 사람들은 정치 권력만 잃었지, 힘 있을 때 자기 것으로 만들어 놓은 땅을 여전히 지배했고, 또 상속했다. 그 결과 본래 자기 땅에 농사짓던 농민들은, 그 땅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는 여러 주인들에게 일종의 세금을 뜯겨야 했다. 마치 가게를 열어 장사하는 사람이 여러 명의 양아치들에게 돈을 뜯기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 상태에서 농민들은 어느 순간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이유가 없어진다. 농사지어 수확해도 자기 몫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고려 말 위기의 핵심이었다.

경향신문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고려 말에 왕이 바뀔 때마다 10번 이상 개혁기구가 설치됐다. 개혁기구들이 내걸었던 개혁 내용은 반복되었다. 성공하지 못했기에 반복된 것이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경작지마다 있는 여러 명의 주인들을 조사해서 본래 주인에게 땅을 돌려주자는 내용이었다. 얼핏 논리적으로만 보면 옳은 주장이다.

고려는 망하기 1년 전에 마침내 토지개혁에 성공했다. 하지만 개혁은 너무 늦었다. 병이 너무 깊었고 수술 중에 환자가 죽고 말았다. 고려가 좀 더 일찍 개혁에 나서고 어느 정도 성공했다면 고려는 망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의미심장한 것은 토지개혁 과정에 나타났던 양상이다.

고려 말 토지개혁이 이루어질 당시, 그 방법을 놓고 두 편으로 나뉘었다. 조준과 이색이 각각을 대표했다. 조준은 정부가 전국의 경작지를 모두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세금 운용을 공정하게 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상식적이며 현실적인 주장이다. 반면에 이색은 토지문서를 조사해 경작지마다 있는 여러 명의 주인 중에서 거짓 주인을 가려내고 본래 주인에게 땅을 돌려주자고 주장했다. 조준의 주장대로 실시하면 이색이 주장하는 것은 저절로 달성되었다. 하지만 이색 주장의 핵심은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전국의 경작지에 대해 정부가 파악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이색의 주장은 벼락부자들의 이익을 희생시켜서 오래된 권력자들의 이익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색의 주장은 그때까지 고려의 ‘개혁파’가 지속적으로 시도했던 토지개혁의 내용이다.

얼핏 보면 조준의 개혁안은 진보적이고 이색의 개혁안은 보수적이다.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조준의 개혁안은 현실적이었고 이색의 개혁안은 비현실적이었다. 긴 세월에 걸쳐 수많은 토지문서가 위조되었다. 권력을 가졌던 증조할아버지가 위조한 문서를 할아버지는 진짜 토지문서로 알고 있었다. 토지에 대한 등기제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무슨 수로 수많은 위조문서 중에서 단 하나의 진짜 토지문서를 가려낼 수 있겠는가.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헤겔은 <법철학 강요(綱要)> 서문에서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이 말은 어디에 강조점을 두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뜻이 된다. 앞쪽에 강조점을 두면 가장 진보적인 주장이 된다. 이성적인 것은 반드시 현실로 구현되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뒤쪽에 강조점을 두면 가장 보수적인 주장이 된다. 현실에 이미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니 굳이 현실을 바꿀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성적인 것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만큼 애매하지는 않다. 물론 사람마다 생각하는 ‘현실적인 것’에는 대단히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선거는 현실적인 것이 어떤 것인가를 집단적으로 결정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어찌 되었든, 현실적이지 않은 쪽이 지게 마련이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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