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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의문학의숨결을찾아] 경주 가정리에 불던 그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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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창건한 최제우 생가 등 답사

신비한 얼굴 표정 가슴속에 선연

세미나를 어디에서 하는 게 좋겠느냐는 전소영 선생 말에 나는 부지불식간에 경주라고 했었다. 물론 현진건 때문이었다. 그의 ‘무영탑’이 나를 경주로 끌어간 것이다. 하지만 경주에서 어디를 답사하는 게 좋겠느냐는 말에 나는 또 나도 모르게 최제우가 태어난 곳이라고 했다.

경주는 남쪽, 서울보다는 확실히 따사로운 곳이지만 어느 때는 더 차가운 날도 있다. 경주 하고도 가정리, 동학을 창건한 신사 최제우 선생을 찾은 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세계일보

방민호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


우리는 가정리를 찾아가다 말고 어느 찻집에 들르기도 했다. 어느 화가 분 작업실이기도 한 그곳 갤러리 카페 JJ에서 노란 창포 그림, 그리고 평면을 입체화한 바다 그림도 보았다. 화랑 같은 카페에 앉아 원두커피의 향취에 코를 맡기고 있을 때 이경재 선생 일행이 뒤미처 당도했다. 이제 본격적인 가정리 순례길이 시작되려고 했다. 이차선 도로에서 오른쪽 농로길로 접어들어 얼마 가지 않아 바로 선생의 생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이 불었다. 나는 “이 바람”이라고 나 혼자만의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그리고 또 “이 공기”라고도 했다. 들판을 건너온 날카로운 겨울바람이 삶의 타성에 젖은 나의 머릿속을 뾰족하게 파고들었다. 선생의 집으로 들어가는 겨울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우리는 무엇이라도 얻으러 온 가난한 이들처럼 낮은 담장 너머로 선생의 영지를 힐끔거렸다. 저쪽편 담장 옆 대숲에 나를 뚫고 간 바람이 자국을 남겼다.

전화로 묻기도 하고 내비게이션도 켜면서 우리는 선생의 묘소가 자리한 가정리 산 75번지를 찾아 올라갔다. 근년 들어 선생을 기리는 움직임이 다소 활발해진 듯하다. 선생의 묘소로 가는 길은 다소 가파르기는 해도 차도 다닐 수 있을 만했다.

묘지 앞에 비석이 서기를, 한글로 도를 전한 선생의 뜻을 떠올리게 하듯 ‘동학 창도주 수운 최제우 스승님 묘’라고 한글로 썼다. 묘소는 허허롭기 그지없어 보이는데, 다시 싸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산 위라서 더 뾰족하게 살을 엘 듯한 찬 바람이다.

나는 차가운 묘소 흙풀에 곱은 손을 얹고 선생의 뜻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보고자 했다. 이 세상 모든 천지만물이, 양반과 상민이, 여성과 남성이, 아이와 어른이 모두 평등한 존재라고 설파한 귀한 뜻을 조금이라도 나누어가질 수 있었으면 싶었다.

돌아서자 경주 분지를 에워싼 나지막하고도 깊은 산들이 아스라이 펼쳐져 있었다. 아직 우리의 순례길은 마지막 코스를 남겨두고 있었다. 선생이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용담정은 묘소에서 멀지 않았다. 가정리 산 63-1번지 구미산 계곡 용담정은 깊은 계곡 속에 묻혀 있었다. 한국 학생만 아니라 중국 유학생, 러시아 유학생까지 있는 우리 ‘국제’ 순례단은 천도교 수도원을 지나 선생이 ‘무극대도’의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용담 정자에 결국 다다랐다.

이 용담정은 본래는 선생의 부친 최옥이 학문을 닦은 곳이었다. 그분은 두 번을 결혼했지만 자식을 얻지 못하고 아내와 사별했고, 뒤늦게 한씨 성을 가진 과수댁을 아내로 다시 맞이하여 63세의 늦은 나이에 선생을 자식으로 얻은 것이었다.

경주 순례에서 돌아와 읽은 ‘최제우 평전’에 따르면 선생은 일찍 어머니와 아버지를 여의고 ‘보부상’이 되어 전국 각지를 떠돌았다고 했다. 한학을 익힌 눈으로 세상을 주유하며 보고 들은 것들, 생각한 것들은 쇠를 다루는 ‘철점’까지 마저 실패하는 거친 시련 뒤의 수련을 통해서 꽃을 피우게 된다.

용담정은 계곡 따라 올라간 막다른 끝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은 사람이 곧 하늘이요, 내 마음이 곧 당신의 마음임을 깨달은 자의 성지답게 그윽하기만 했다. 용담정사 안에 모신 선생의 영정은 그의 정신이 이 거친 현대에도 여전히 살아 있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돌아나오는 길에 바로 옆 약수가 솟아오르는 곳에서 우리는 신비로운 표정을 지닌 한 여인을 만났다. 그분은 이곳 수도원에 계신다 했는데, 얼굴에 아무런 ‘번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서울에 올라온 뒤에도 그 얼굴빛이 가슴속에 선연한 것은, 앎과 실천을 함께하는 사람은 그늘 없이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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