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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의 한 순간 실수로 60년 유령처럼 살게 된 여성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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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주민등록증 자료사진. /행정자치부 제공


1962년 6월 29일 태어난 장모씨. 장씨의 아버지는 딸이 태어나고 5년 뒤 출생신고를 했다. 당시에는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간 시간이 지난 뒤 출생신고를 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담당 공무원은 장씨의 생일을 1962년 2월 29일로 잘못 등록했다. ‘6′이 ‘2′로 바뀐 것이다. 이장이 마을 아이들의 출생신고를 대리하기도 하던 시절, 실제 생일과 주민등록상 생일이 다른 건 이해 가능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 날짜에 있었다. 하필 2월 29일이 4년에 한번씩 돌아오는 윤일(閏日)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62년은 2월 28일까지만 있는, 윤일은 있지도 않은 해였다. 장씨는 졸지에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날인 ‘620229′로 시작하는 주민등록번호를 갖고 살게 됐다.

그래도 수기(手記)로 정보를 처리하던 아날로그 시절에는 사는데 큰 불편은 없었다고 한다. 컴퓨터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장씨의 일상에 하나 둘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본인 인증의 기본 절차인 주민등록번호 확인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1962년 2월의 달력은 28일까지만 표기하고 있기에 장씨의 주민등록상 생일을 선택할 수조차 없었고, 입력한다고 해도 컴퓨터는 “존재하지 않는 날짜”라며 오류로 인식했다. 장씨는 졸지에 가질 수 없는 주민등록번호를 가진 유령 같은 존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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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2월 달력. 28일까지만 존재한다.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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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씨 이름으로 된 통장이나 카드도 발급받지 못했고, 통신사 가입도 하지 못해 남편 이름의 휴대전화를 사용해야 했다. 보험 가입은 가능했지만 해지 후 환급금을 받으려고 하자 본인 이름으로 된 통장이 아니면 돌려줄 수 없다는 이유로 돌려받지 못했다. 해외 여행을 갔다가 공항에 발이 묶여 고생하기도 했다. 출국할 때는 복잡한 절차를 거치긴 했지만 본인임을 인증해 어찌저찌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그러나 돌아올 때가 문제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일본 공항에서 장씨는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한 끝에 본래 예정된 시간보다 몇 시간이나 기다린 끝에 겨우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다 코로나가 확산하면서 장씨의 삶은 또 한번 높은 벽을 만나게 됐다. 백신 예약을 온라인으로 해야 했지만 주민등록번호 입력이 되지 않았고, 전자 접종증명서나 QR코드 역시 발급되지 않았다.

장씨는 주민등록번호를 제자리로 돌려놓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고민을 안해본건 아니었다. 그러나 각종 서류를 준비해 법원의 결정을 받는다는 게 장씨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장씨는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법률 지식이 부족해 법의 보호를 충분히 받지 못하는 국민을 위해 법률 서비스를 지원하는 대한법률구조공단을 찾았다.

소송을 수행한 박성태 변호사는 “장씨는 온라인 상담 예약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평생 불편을 감수하며 살아오셨다”며 “하루라도 빨리 이를 해결해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박 변호사는 1962년 2월 29일이 명백하게 존재하지 않는 날이라는 점과 장씨가 졸업한 학교 생활기록부에는 장씨의 출생일자가 1962년 6월 29일로 되어 있다는 점, 가족들이 지금까지 6월 29일에 장씨의 생일잔치를 해왔다는 점 등을 법원에 증거로 제출했다. 이 밖에도 여러 차례 재판부에 전화해 결정을 재촉했다고 한다. 춘천지방법원은 지난달 28일 장씨의 출생일을 ‘1962년 6월 29일로 정정하는 것을 허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장씨는 “올해 환갑을 맞아 마치 새 삶을 살게 된 것 같다”며 기뻐했다. 이제 주민등록증도 새로 발급받고, 여권과 통장도 만들어 여행을 가는 게 소원이라는 그는 “딸들이 축하 파티를 해주기로 했다”며 웃었다.

공무원의 실수로 수많은 고충을 겪은 장씨지만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건 쉽지 않다. 박 변호사는 “장씨가 국가의 잘못으로 고통을 겪은 피해자라는 사실은 명확해 보인다”면서도 “장씨가 겪은 피해를 금액으로 환산해야 하는데, 이를 추정하는 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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