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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남녀동수, 임신중단 권리’ 개헌은 성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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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구정은의 현실지구

칠레 ‘사회적 폭발’ 결말은?

3년 전 불공정 사회에 분노 터져

대통령 바꾸고, 새 헌법안 마련

평등·인권·환경, 파격 내용 담아

보수층 뚫고 9월 개헌 될지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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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제헌의회 의원들이 지난 16일(현지시각) 새 헌법 초안을 제시하며 환호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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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파가스타는 칠레 북부에 위치한 인구 40만명의 항구 도시다. 수도 산티아고에서 북쪽으로 1100㎞ 떨어진 곳에 있다. 스페인에 맞선 독립전쟁 당시에 볼리비아와 칠레 사이에 영토분쟁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칠레는 19세기 말 ‘태평양 전쟁’으로 이 지역을 장악했고, 1904년 ‘평화우호조약’을 통해 분쟁을 끝냈다. 은과 질산칼륨 광산을 주변에 둔 수출항이기도 하지만 칠레 입장에선 독립과 영토 주권에 관련된 의미 깊은 곳이기도 하다.

또한 여기엔 후안차카가 있다. 토착민 언어인 케추아 말로 ‘슬픔의 다리’라는 뜻이다. 인터넷에서 사진을 찾아보면 마치 고대의 석조사원처럼 보이는 웅장한 건물이 버려진 채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은 고대의 성채나 사원이 아니라 19세기 은 주조공장의 잔해다. 콜럼버스가 이른바 ‘신대륙’에 도착한 이래로 남미의 은은 유럽의 제국들을 먹여 살리는 수단이었다. 그 번영의 그늘에는 남미 원주민들이 겪어야 했던 비극이 있었다.

폭발한 분노, 새 칠레 요구로 분출


지금은 박물관과 문화공원지구로 바뀐 이 유적지에서 지난 15일 마리아 엘리사 킨테로스 제헌의회 의장은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히 민주적으로 만들어진 헌법 초안”을 공개했다. 제헌의회는 지난해 10월부터 옛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시절 만들어진 헌법을 대체할 새 헌법 초안을 만들었다. 새 헌법은 오는 9월 국민투표에 부쳐진다.

시장 지상주의에서 인권과 사회적 권리 쪽으로 초점을 이동시킨 역사적인 헌법이라고 제헌의회는 강조한다. 킨테로스는 “우리는 교육, 주택, 일,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는 더 정의로운 칠레를 건설하기 시작할 것” “모든 사람들이 보호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삶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 서로 관계를 맺는 새로운 방법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칠레의 마그나카르타라 불리는 헌법 초안은 원주민 자치를 늘리고 환경권을 확대한다는 내용을 담았고, 기후변화 대응을 국가의 의무로 명시했다. 상원은 ‘지역회의’로 바꾸기로 했다.

살바도르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권이 미국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무너진 뒤 칠레 사람들은 어느 나라보다 잔혹한 독재권력의 횡포를 겪었다. 반정부 지식인, 학생들의 탄압, 납치, 고문, 살해, 투옥 등등. 그런 상처는 사라지지 않은 채 ‘과거사’라는 이름으로 오래도록 흔적을 남긴다. 피노체트 시대가 남긴 또 다른 상처는 그 후 한 세대 동안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뒤엎은 사회경제적인 폭력과 수탈의 구조다. 시장이 다 알아서 할 테니 정부는 국민의 삶에서 손을 떼라며 기간시설을 민간에 팔아넘기게 하고, 서방 자본이 들어가 광산에서 금융까지 멋대로 주무르게 만든 신자유주의의 횡포가 극에 달했던 곳이 칠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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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가 이뤄지고, 피노체트의 탱크에 짓밟혔던 산티아고의 ‘라모네다’ 대통령궁 주인은 주기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피노체트의 유산, 그중에서도 1980년 헌법에 규정된 억압적이고 불공정한 구조는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2019년 10월, 수도 산티아고에서 지하철 요금이 오르자 시민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3년 동안 이어진 ‘에스탈리도 소시알’(사회의 폭발)의 시작이었다. 세바스티안 피녜라 당시 대통령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대를 배치했지만 피노체트 말기의 민주화 시위 이래 최대 규모로 일어난 시민들의 봉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칠레 시민들은 대통령 퇴진을 넘어선 더 큰 변화를 요구했다. 지하철 표를 살 돈도 없을 정도로 서민들을 가난하게 만든, 국가의 부를 기득권 엘리트들이 독차지하게 만든 구조 자체를 바꾸자는 것이었다. 2020년 10월 국민투표에서 칠레인들은 80% 가까운 찬성으로 새 헌법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지난해 5월 155명의 제헌의회 의원이 선출됐다. 유럽계 기득권층 중심인 의회와 달리 마푸체, 아이마라 등 원주민 대표들이 의석을 확보했으며 전체 ‘남녀 동수’로 구성됐다. 12월 대선에서는 과거 교육개혁 시위를 주도한 경력이 있는 1986년생 가브리엘 보리치가 대통령에 선출됐다.

이번에 공개된 헌법 초안은 499개 조항이다. 제헌의회가 103차례의 총회를 거쳐 만든 것이다. 모든 국가기관, 공기업과 준공기업의 구성원은 남녀 동수로 만든다고 한다. 망명신청자나 난민들을 강제추방하는 것은 금지된다. 자발적인 임신중단을 여성의 권리로 보장한다. ‘법적 다원주의’를 집어넣어 원주민 자치법원을 만들 수 있도록 했고, 사법부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법원을 감독하는 ‘정의위원회’를 구성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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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4일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린 칠레 제헌의회 창립총회에서 제헌의회 의장으로 선출된 엘리사 롱콘 마푸체 원주민 대표가 팔을 들어올리고 있다. 들어올리고 있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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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헌법이 국민투표에서 통과될까. 1800만 인구 가운데 90% 가까이가 유럽계이고, 가톨릭 60%에 개신교 18%를 더하면 인구 다수가 기독교도다. 격차가 심한 만큼 상층부 엘리트들이 많은 걸 틀어쥐고 있다. ‘경제 자유주의’를 내건 우파 정당 바모스가 상원 과반과 하원 3분의 1을 장악하고 있다. 주 정부들을 많이 차지한 중도좌파 ‘새로운 사회계약’과 사회당, 존엄당, 기독민주당 등이 우파에 맞서고 있지만 보수언론과 기득권층의 반격은 거세다. 지난달 여론조사에서 유권자 46%가 헌법안에 반대할 것이라고 답했다. 무엇보다 재산권에 대한 걱정, 연기금 제도의 변화에 대한 우려가 컸다. 좌파 국제언론 프레센사는 “군정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 과정은 실패로 판명 났으며 사회의 대다수는 성장과 복지로 경제적, 사회적 병폐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서 개헌안을 환영했다. 하지만 성장과 복지 어느 쪽도 아닌 ‘새로운 모델’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과거 족쇄 이번엔 깰 수 있을까


코로나19 이전 칠레의 1인당 연간 실질 국내총생산은 2만5000달러로 남미에서 안정된 경제에 재정건전성도 높은 편이다. 그러나 정부 재정의 20%를 구리 수출에 의존하는 현실을 단시간 내 바꿀 수는 없다. ‘새로운 모델’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자원 중심의 경제구조를 바꾸자고 말하지만 구리와 목재와 와인을 수출해 돈 버는 경제구조를 바꾸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불평등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는 몇년 동안의 시위로 확실하게 표출됐다. 남녀 동수에 원주민 의석을 보장한 제헌의회가 만들어진 것만으로도 칠레인들은 엄청난 정치적 의지와 역량을 보여줬다. 인구의 10% 가까이를 차지하는 최대 원주민 부족 마푸체는 “헌법안이 부결되든 승인되든 원주민들은 이미 이겼다”고 말한다. 하지만 새 헌법을 향한 열기는 점점 사그라지고 있다. ‘최연소 대통령’ 보리치에게는 헌법 국민투표가 가장 큰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신문기자로 오래 일했고,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 <10년 후 세계사> 등의 책을 냈다. 국제 전문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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