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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광화문 벼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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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습자지와 벼루는 나의 옛날에까지 가닿는 물건이다. 이제 습자지는 사어가 되다시피 하였지만 벼루는 그 숱한 이사에도 용케 잘 따라다녔다. 그렇다고 서예를 제대로 익힌 건 아니었고, 그저 글씨가 좋아서 붓을 가지고 놀 때 바탕이 되어 준 소꿉친구 같은 것이었다.

오래전, 경주박물관에서 ‘검은 구름을 품은 벼루 硯’이라는 특별전을 보았다. 그동안 몽매한 나로부터 맷돌 정도의 취급이나 받던 벼루는 그날 자기야말로 문자향의 연못이라는 것을 내 마음에 은근히 각인시켰다.

어느 해, 울산의 반구대암각화를 찾았다. 반구서원에서 암각화를 보는 전망대까지 가는 길은 사뭇 호젓하였다. 이 길의 끝에 선사시대의 생생한 흔적이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자못 두근거렸다. 예사롭지 않은 느낌으로 숲길을 통과하는데, ‘울주 대곡리 연로개수기’라는 안내판이 큰 바위 앞에 있었다. 여기에 새겨진 글자가 이 길의 이름이 연로(硯路), 즉 벼룻길이라는 것을 분명 말해준다고 했다. 대곡천 일대는 암석이 발달한 지형으로 암각화를 비롯해 천전리각석, 공룡발자국 화석 등 바위에 새긴 유적이 모여 있다. 문득 천진한 개울물을 운반하는 시내의 돌바닥을 비롯한 이 일대가 하나의 거대한 벼루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서울 평창동에서 벼루전시회가 열렸다. 손때 하나 묻히지 못한 명품 벼루들을 보고 나오는데 뭔가 안타까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리도 근사한 벼루가 어쩌면 연적의 물맛 한번 못 보고, 먹과 붓하고 연애 한번 못한 채 우리 이후 어느 까마득한 시대에 매운재로 폭삭 주저앉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평창동 골짜기를 지나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를 빠져나오면 곧 광화문이다. 단단한 바닥을 걸어가는데 대곡천의 그 돌들이 퍼뜩 떠오르면서 이 광장도 하나의 거대한 벼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란 누구나 일생을 던져 두 발로 자신만의 서사를 적어가는 존재이다. 한 자루의 꼿꼿한 붓처럼 오늘 하루치의 이야기를 쓰는 행인들, 암각화에서 뛰쳐나온 고래와 공룡이 광화문 광장에서 한바탕 잘 어우러지는 것 같았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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