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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복을 짓는 사람...오히려 환자에게 고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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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내가 살린 환자, 나를 깨운 환자'
최연장·최연소 필자 정재화·오연택 인터뷰
한국일보

26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내가 살린 환자, 나를 깨운 환자'의 저자 정재화(왼쪽) 성남요양병원장과 오연택 국립공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가 책에 대해 인터뷰하고 있다. 김영원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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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환자들을 '복전(福田)', 복을 짓는 밭으로 생각해야 해요. 복 짓는 일을 하게 하니 의사로서 오히려 환자들에게 고맙죠."

올해로 의사 인생 만 50년을 맞은 정재화(75) 성남요양병원장은 의사를 '복을 짓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또 의사의 본업은 환자들의 두려움을 없애주는 '무외시(無畏施, 보시의 일종)'라고 했다. 그러니 의사에게 복을 짓는 일을 하게 해주는 환자들이 고마운 존재라고 했다.

내과 전문의로 반세기 동안 20만 명의 환자를 만나며 산전수전을 겪은 정 원장은 기억에 남는 환자에 대한 의료종사자들의 고백을 담은 책 '내가 살린 환자, 나를 깨운 환자'의 필자로도 참여했다. 지난해부터 올 초까지 한국일보에 연재된 동명의 기획을 묶은 것으로, 당시 의료진의 진솔한 면모와 환자와 보호자의 가슴 먹먹한 사연들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지난달 황소자리 출판사에서 출간된 '내가 살린 환자, 나를 깨운 환자' 54명 저자 가운데 각각 최연장·최연소인 정 원장과 오연택(28) 국립공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를 한국일보 본사에서 함께 만나봤다.

정 원장이 기억하는 환자는 1970년대 중반에 시골에서 농약을 마시고 병원에 실려온 소년이다. 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되기 전인 그 시절, 출혈이 잡히지 않자 의료진도 가족도 치료를 포기하고 퇴원을 결정했다. 그런데 고작 인턴 신분인 정 원장이 환자를 막아섰다. "그대로 집에 가면 100% 죽는 상황이었다. 환자의 형을 붙잡았더니 '치료비가 없는데, 못 내면 도둑이 된다'고 하대. 그래서 '이대로 가면 사형인데 사형이 낫냐, 도둑 돼 콩밥 먹는 게 낫냐'며 설득했지." 병원비를 못 내니 빈 침대를 찾아 옮겨다니고 남는 약을 구하러 백방으로 뛰어야 했지만 그는 당직이 아닌 날에도 병원에 남아 소년의 상태를 살폈다. 결국 출혈은 멎었고 환자는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했다.
한국일보

인터뷰하는 정재화 성남요양병원장. 김영원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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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의대 본과 1학년 때 공부하다 졸도했는데, 마룻바닥에서 깨어나는데 눈물이 주르륵 흐르대. 그때 '나중에 의사가 되면 내가 아니었다면 죽을 사람을 한 사람 살리고 싶다'는 원을 세웠었다. 그런데 그걸 인턴 때 이룬 거지."

올해 전공의 2년차인 새내기 의사 오연택씨도 인턴 시절 겪은 환자가 뇌리에 깊게 남았다. 갓 의사가 된 2020년 3월 코로나19 사태가 확산되기 시작했고, 4월에는 감염병이 불길처럼 번지면서 대학병원들은 급히 격리병동을 만들었다. 당시 그는 격리병동에서 중환자실 환자의 검사와 처치를 담당했다. 보호복이 고장난 것도 모르고 한시간에 50명씩 코로나 검사를 하다가 쓰러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위독해진 한 환자를 보려고 가족들이 달려왔지만 코로나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아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사망 이후에야 음성 판정을 받아든 모습을 목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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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오연택 전공의. 김영원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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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팬데믹 초기라 환자가 폐가 안 좋거나 열이 나면 코로나 음성 판정을 받기 전에는 보호자가 아무도 병실에 들어올 수 없었어요. 환자 임종도 못 보고, 음성 결과가 나온 뒤에도 병실에서 5분 만에 쫒겨나 복도에서 엉엉 울고 있는데 너무 쓸쓸한 풍경이었어요. 차라리 환자가 병원에 오지 말고 집에서 가족들과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었어요."

의사로서 냉정함을 유지해야 했지만 쓸쓸한 감정을 견디기 어려웠던 그는 며칠 뒤 일기장에 그 상황을 간단히 적었다.

"정신과에서는 '쓰기 노출 치료'라고 가슴 아픈 일을 겪으면 당시 감정이나 생각을 적게 하는 일종의 트라우마 치료가 있는데 아마 저도 그런 경우 같아요. 이번 책에도 의료인들이 겪은 이른바 '배드엔딩' 사연이 많은데, 오래전 일을 떠올리고 당시를 객관적으로 살펴보며 스스로 위로하는 차원에서 이런 글들이 나오지 않았나 싶어요."
한국일보

'내가 살린 환자, 나를 깨운 환자'. 김영원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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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전공의는 '내가 살린 환자, 나를 깨운 환자' 책에 대해 "초보든 완숙한 의사든 답답한 상황을 이겨내려는 따뜻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의사로서 겉으로는 냉정함을 유지하지만 안으로는 함께 아파하고 흔들린다. 그는 "사회적으로 의사는 공감능력이 부족하다는 시선이 많은데, 의료 윤리나 의사·환자의 관계에 대한 교육이 강화되고 있다"며 "상처 받고 힘든 점이 있어도 각자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점을 이해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의 얼굴에는 최근 정신질환 환자가 휘두른 둔기에 찍힌 상처가 선명했지만 "솔직히 무섭지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담담히 말했다.

정 원장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환자를 위해 노력하고, 결과가 안 좋을 때 안타까워하는 의사들의 사연을 보면서 동지애를 느낄 수 있었다"는 감상 소감을 전했다. 그는 "물론 현실에서 그렇지 못한 의사도 봤지만, 결국 잘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며 후배 의사들에게 "인생관을 잘 정립해야 한다"는 조언도 건넸다.

송은미 기자 mys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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