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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래잡기] 세상에 저항하는 노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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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현의 미술래잡기 ◆

매일경제

4년 만에 돌아온 월드컵이다. 손흥민 선수가 부상당했을 때 모두가 내뱉던 탄식에 함께했고, 마스크를 쓰더라도 경기를 뛰겠다는 의지에 박수를 보냈다. 대표팀에서 안 아픈 선수를 찾는 게 쉬울 정도로 모두가 부상을 안고 뛰었다.

최상의 컨디션으로만 경기를 치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이상일 뿐이다. 축구에서만 아니라 사실 우리 삶은 언제나 갖가지 태클의 연속이다. 지금도 신나는 축구 빼고는 모든 뉴스가 시련으로 도배되어 있다.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모르겠고, 세계 경제의 먹구름은 짙어지며, 북한에서는 미사일이 날아오고, 국내 정치는 계속 줄다리기만 한다. 나라도 제대로 살자고 열심히 준비한 기획안을 상사가 엎어 버리고, 동료가 독감에 걸려 갑자기 일이 늘어나고, 겨우 마련한 휴가인데 아이가 코로나에 걸려 버린다. 과연 맘먹은 대로 평온하게 지낼 날이 오기는 오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는 우리 모습은 매일이 국가대표팀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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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사투(死鬪)인 우리 모습에서 미켈란젤로의 '저항하는 노예'(1513)라는 조각이 생각났다. 제목처럼 손이 묶인 남성이 결박을 풀려고 상체를 세차게 흔들어 몸을 한껏 트는 것이 축구 선수들 같고 우리들 같다. 원래 이 작품은 당시 교황인 율리오 2세가 사후 성 베드로 성당 중앙에 위치할 자신의 영묘(靈廟)를 주문하며 1505년 시작되었다. 격렬한 움직임으로 구조물 하단의 한정된 공간을 화려하게 채우려던 작가의 발상이 돋보인다. 영묘 작업을 위해 미켈란젤로는 재료인 대리석을 구하려 8개월을 보낼 정도로 심혈을 기울이다가, 당시 유럽 최고권력자인 교황과 말다툼을 하고 로마에서 떠나버리기도 했다. 그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 반, 골탕 먹이고 싶은 마음 반으로 교황은 모두가 꺼리던 시스티나 성당 작업을 의뢰했는데, 미켈란젤로는 또 이를 받아들여 4년간 묵묵히 천장화를 마무리하고 영묘 작업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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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오 2세는 1513년 사망했다. 의뢰인이 사라졌으니 이제부터는 온전히 작품에만 집중하고 싶은데, 이제는 유족이자 유럽 최고 가문 중 하나인 델라 로베레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계약의 내용을 변경해댔다. 결국 최종 영묘는 1545년에야 완성되었고, 이미 오래전에 바뀐 도안상 '저항하는 노예'는 여기서 제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는 처음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 만들었던 작품을 간직하고 있다가, 자신처럼 피렌체 출신으로 로마에서 자신을 돌보아주었던 로베르토 스트로치에게 조각을 선물하였다.

교황 기념물에 왜 노예였을까? 율리오 2세의 지배 아래 놓인 지역을 상징한다는 설도, 마음고생을 하는 작가 자신의 모습을 은유한다는 설도 있다. 메디치가문에 반기를 드는 스트로치에게 작품을 주면서 피렌체의 자유를 지지했다는 해석도 있다. 확실한 것은 티격태격하던 율리오 2세와 미켈란젤로는 둘 다 고대 로마의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로마시대 조각에 자주 등장하는 노예와 포로라는 테마를 통해 둘의 애증관계, 나아가 자신을 구박하면서도 항상 믿어주었던 교황에 대한 마음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유명해도 신분은 미천한 예술가로 힘이 없었지만, 미켈란젤로는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여러 난관을 받아들이며 결국 당시의 권문세가 그 누구보다 제일 유명한 인물로 역사에 남을 수 있었다. 시스티나 천장화를 그리라는 무리한 요구를 극구 거부했더라면, 교황이라는 절대권력자에게 대들지 않고 시키는 것만 했다면, 수시로 변하는 주변 상황에 질려서 조각을 접었더라면 그의 이름은 이렇게 오래 회자되지 못했다.

두 시간 가까이 쉴 새 없이 뛰어다니는 축구 선수들의 모습을 보면 우리 속에서 뭔지 모를 에너지가 생긴다. 그것만으로도 우리 꽉 막힌 가슴을 뚫어주는 감사한 이벤트가 아닐 수 없다. 결국에는 삶의 노예인 그들도 우리도 일단은 열심히, 한 경기 한 경기, 하루하루, 나를 핍박하는 모든 도전에 저항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건 없는 것 같다. 남은 기간 젊은 전사들이 아파도 다쳐도 태클에 굴하지 않고 뛰는 모습에서 생명력을 음미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지현 OCI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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