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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살기 위해 밤마다 거짓 단어를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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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페르시아어 수업’ 15일 개봉

나치 수용소에 끌려온 유대인

장교에게 가짜 언어 가르쳐 생존

문학·역사 아우른 지적 재미 선사

조선일보

‘페르시아어 수업’의 유대인 질(나우엘 페레스 비스카야트·왼쪽)과 나치 장교 코흐(라르스 아이딩어).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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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목숨이 질기다는데, 딱 네 놈 이야기구나.”

1942년 나치 수용소에 끌려온 유대인 ‘질’(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 끌려오던 도중에 우연히 구한 페르시아어(語) 책을 꺼내들고 나치 병사들 앞에서 이란인 흉내를 내기 시작한다. 엉겁결에 주워들은 ‘아버지’라는 단어 하나가 실은 알고 있는 페르시아어의 전부. 거짓말이 탄로 나는 순간, 총알 세례를 피하기 힘든 신세다.

하지만 페르시아어를 배우려는 나치 친위대 장교 ‘코흐’(라르스 아이딩어)의 눈에 띄면서 졸지에 ‘가짜 페르시아어 강사’로 변신한다. 이란은 2차 대전 당시 중립을 선언했지만, 친독(親獨) 성향을 우려한 영국과 소련에 의해 1941년 침공당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당시 영국 총리 처칠은 회고록에 “영국과 러시아는 각자의 생존을 위해 싸웠을 뿐이었다. 전쟁 중에는 법은 침묵하는 법”이라고 적었다.

조선일보

영화 '페르시아어 수업'.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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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개봉하는 ‘페르시아어 수업’은 이제는 고전이 된 ‘쉰들러 리스트’(1993)와 ‘사울의 아들’(2015)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드는 묘미가 있는 영화다. 나치에 협력할 수밖에 없는 유대인 수용자의 처지에 초점을 맞추면 ‘사울의 아들’을 닮게 되고, 반대로 유대인을 보호하려는 나치 장교의 선의(善意)로 기울면 또 한 편의 ‘쉰들러 리스트’가 된다. 독일 작가이자 감독 볼프강 콜하세(1931~2022)의 단편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는 2020년 베를린영화제 초청작으로 이 두 작품 사이에서 예측 불허의 줄타기를 지속한다.

참혹한 나치 시기를 다뤘던 영화들은 적지 않다. 하지만 ‘페르시아어 수업’이 독특한 건, 오로지 생존을 위해서 거짓 언어를 창조해야 하는 평범한 남자의 운명을 다룬다는 점이다. 강제 노역에 시달리면서도 많게는 하루 40개의 단어를 만드는 건 물론, 엊그제 지어낸 단어를 까먹지 않기 위해서 밤잠을 못 이루고 자신의 거짓 단어를 외워야만 한다.

처음에는 목숨 걸고 가짜 단어를 고안하는 질의 딱한 처지가 쓴웃음을 자아낸다. 수용소 정문에 걸려 있는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Jedem das Seine)’이라는 나치의 섬뜩한 구호는 질의 운명을 보여주는 영화적 장치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 중반에는 짜릿한 반전이 기다린다. 거짓부렁으로 지어낸 가짜 페르시아어로 나치 장교와 유대인 수용자가 실제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는 것이다. 거짓이 진실을 대체하는 이 장면이야말로 영화에서 가장 문학적이면서도 영화적인 대목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시대극의 외양을 지니고 있지만, 실은 판타지의 요소를 은밀하게 내포하고 있다. 과연 질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막판 반전의 충격은 적지만, 언어와 역사의 관계를 다룬다는 점에서 상당한 지적 재미를 선사한다.

[김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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