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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1 (금)

짜릿하고 청량하다…다시 쓰는 여섯 왕비의 역사 [고승희의 리와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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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의 여섯 왕비 이야기

전 세계 강타한 웨스트엔드 화제작

최초 내한 공연 이어 첫 한국어 무대

헤럴드경제

헨리 8세 여섯 왕비의 이야기를 담은 ‘식스 더 뮤지컬’은 2017년 에든버러 페스티벌을 통해 첫 선을 보인 이후, 2019년 웨스트엔드, 2020년 브로드웨이에 입성하며 신선한 돌풍을 일으켰다.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서 내한 공연을 진행했고, 오는 31일부턴 세계 최초 라이선스 공연이 막을 올린다. [클립서비스, Manuel Harla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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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이혼, 참수, 사망, 이혼 참수, 생존.’ 우릴 모두 여섯 명의 전 부인으로 알지.”

이것은 ‘일종의 선언’이다. 한 남자의 ‘이름’ 뒤에 가려진 ‘전 부인’이 아닌 ‘나’의 이야기를 하겠다는 선전포고다. ‘히스토리(History)’가 아닌 ‘허스토리(Her story)’의 시작. 역사 속 주인공이 직접 쓰는 새로운 시대의 역사다. 시간은 500년 전 영국의 튜더 왕가로 되돌아간다. 헨리 8세에겐 출신도 제각각인 여섯 명의 왕비가 있었다. 두세 줄 짜리 역사로 기술한 여섯 왕비의 ‘사연 많은 삶’이 80분 짜리 팝 뮤지컬로 다시 태어났다. ‘식스 더 뮤지컬’이다.

작품은 영국에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 동문인 20대 동갑내기 창작진 토비 말로와 루시 모스가 2017년 에든버러 페스티벌을 통해 첫 선을 보인 이후, 2019년 웨스트엔드, 2020년 브로드웨이에 입성하며 신선한 돌풍을 일으켰다. 현재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서 내한 공연을 진행했고, 오는 31일부턴 세계 최초 라이선스 공연이 막을 올린다.

뮤지컬은 ‘종주국’이 가진 두 개의 역사를 안고 태어났다. 스토리와 음악이 그렇다. ‘웨스트엔드 뮤지컬’이기에 잘 살릴 수 있는 이야기와 넘버가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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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 여섯 왕비의 이야기를 담은 ‘식스 더 뮤지컬’에서 클레페를 연기한 제시카 나일즈. [클립서비스, Manuel Harla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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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요받은 품위 내던진 여왕들…내 이야기를 들어봐

“다들 좋아하는 여왕 한 명은 있잖아?”

본격적인 막이 오르기 전 당연한 듯 툭 던진 한 마디. ‘식스 더 뮤지컬’은 흥미로운 뮤지컬이다. 6인조 걸그룹이 되겠다는 여섯 명의 왕비. 한 사람씩 나와 저마다의 ‘기구한’, 혹은 ‘비극적인’ 삶을 이야기한다. 이들의 사연 중 가장 ‘핍박받은 주인공’이 메인 보컬이 된다는 기발한 발상이다.

강요받은 정숙과 품위, 학습된 체면치레는 벗어던진 여섯 왕비는 그들 스스로가 다시 쓴 역사를 통해 온전한 주인공으로 다시 태어났다.

팝스타처럼 화려한 여섯 여왕은 등장부터 존재감이 강렬했다. ‘이혼’, ‘참수’, ‘사망’, ‘이혼’, ‘참수’, ‘생존’. 한 사람씩 등장해 자신의 최후를 말하는 목소리가 짜릿하고 청량하다.

헨리 8세의 외도로 이혼 당한 첫 번째 왕비 캐서린 아라곤, 외도 상대에서 두 번째 왕비가 된 ‘희대의 요부’ 앤 불린, 헨리 8세의 마지막을 지켜본 캐서린 파까지 왕비들은 사연 만큼 캐릭터도 독특하다. 왕비들은 영국의 TV 시트콤이나 드라마의 주인공 여섯 명을 모아둔 것처럼 독특하다. 괴짜 같은 여왕들은친구를 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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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 여섯 왕비의 이야기를 담은 ‘식스 더 뮤지컬’에서 희대의 요부 앤 불린을 연기한 제니퍼 콜드웰 [클립서비스, Manuel Harla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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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 대신 마이크를 집어든 여왕들은 로커처럼 거침없고, 래퍼보다 신랄하다. 남성 중심의 역사에서 요구된 희생, 저항하지 못한 불합리와 부당함을 유쾌하게 폭로한다.

‘가려진 역사’ 속 주인공들의 숨은 이야기가 기막히다. 바람난 남편으로 인해 수도원으로 쫓겨날 위기에 처한 첫 번째 왕비 캐서린 아라곤, 남편의 바람기에 맞바람을 피다 ‘참수’ 당한 앤 불린, 그 시절의 ‘프사’(프로필 사진)인 초상화와 얼굴이 다르다며 이혼 당한 클레페. 어린시절부터 남성들에게 성적으로 착취 당한 다섯 번째 왕비 캐서린 하워드, 여성들이 이름을 드러내지 못한 시대에서 자신의 이름과 영어로 책을 출판한 최초의 작가이자 여성 운동가인 마지막 왕비 캐서린 파의 이야기는 채워지지 않은 역사 속 여성들의 이야기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한 줄 흘려버릴 수 없는 위트 있는 가사와 그 안에 숨은 언어 유희가 파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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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 여섯 왕비의 이야기를 담은 ‘식스 더 뮤지컬’에서 다섯 번째 부인 하워드 역을 맡은 레베카 위크스. [클립서비스, Manuel Harla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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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섯 여왕의 각기 다른 음악 장르…매력적 캐릭터 만든 힘

이 작품의 가장 큰 힘은 ‘음악’이다. 미국과 함께 주류 팝 시장을 이끌고 있는 영국의 팝 음악사가 이 한 편의 뮤지컬에도 녹아있다. ‘식스 더 뮤지컬’의 ‘역사 비틀기’는 각기 다른 여섯 개의 음악 장르와 함께 화려한 옷을 입었다. 뮤지컬이지만, 라이브 콘서트에 가까운 공연의 묘미가 살아난다. 한국의 뮤지컬과는 다른 팝 발성으로 노래하는 배우들의 뛰어난 가창력과 낯설지 않은 멜로디로 인해, 누구라도 거부감 없이 80분을 즐길 수 있다. 여섯 왕비들이 각자의 노래를 부를 때 특정 팝스타를 떠올렸다면, 그 예상은 정답으로 향할 확률이 높다. 여섯 왕비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캐릭터와 노래를 완벽하게 소화, 낯선 영국 역사까지도 흥미롭게 만들었다.

가장 긴 시간 결혼 생활을 유지한 첫 왕비 아라곤은 비욘세와 샤키라에게 영감을 받은 음악으로 ‘노 웨이(No way, 말도 안돼)’를 외치며 폭발적인 가창력을 보여준다. 톡 쏘는 사이다처럼 하이C까지 시원하고 청량하게 솟아오르는 아라곤의 보컬은 관객들을 휘어잡기에 안성맞춤이다. ‘최악의 불륜녀’로 낙인찍힌 불린은 한 때 10대들의 우상이었던 에이브릴 라빈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에이브릴 라빈과 릴리 알렌에게 영감을 받은 캐릭터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천방지축 반항아는 ‘참수’의 비극조차 유머코드로 승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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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 여섯 왕비의 이야기를 담은 ‘식스 더 뮤지컬’에서 아라곤을 연기한 클로이 하트. [클립서비스, Manuel Harla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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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왕비 중 유일하게 장례식을 치르며 헨리8세와의 진실한 사랑을 강조한 세 번째 부인 시모어는 영국 팝스타 아델과 시아에게 영감받은 깊이 있는 발라드 무대를 보여준다. 진한 감성 무대 뒤로 ‘프사’ 사태를 불러온 클레페의 당돌한 무대가 이어진다. 실물과 그림이 다르다며 이혼당하지만, 힙합 장르의 속사포 래핑에 감춰둔 속내가 당돌하고 당차다. 니키 미나즈를 떠올리게 하는 무대다. 성 착취를 당한 다섯 번째 부인 하워드는 록 넘버로 “네가 원한 건”이라는 가사를 통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이제 “장난은 끝”이라며 자신의 길을 찾는다. 마지막 왕비 캐서린 파는 서정적인 알앤비 기반의 멜로디로 주체적인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이 작품이 매력적인 것은 음악과 이야기가 절묘하게 만났다는 점이다. 전혀 다른 개성의 여섯 왕비에게 딱 맞는 음악적 장르와 캐릭터를 준 것은 특히나영리한 선택이다. 저마다의 스토리를 통해 ‘전형적인 선택’이 나올 수도 있었다. 세 번째 부인 시모어나 마지막 부인 파의 음악 장르는 잔잔한 발라드 이외의 선택은 예측 가능했다. 하지만 이 작품만의 재해석도 나왔다. ‘요부’로 그려진 불린을 그간 영미 드라마가 보여준 것처럼 섹시한 팝가수의 뻔한 모습으로 그리지 않았다. 헨리 8세는 자존감을 밟았지만, ‘나는 너에게 과분한 사람’이라며 할 말 다 하는 래퍼의 모습으로 클레페를 상징했고, 착취 당하던 여성의 삶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로커로 하워드를 그려낸 것도 이 작품이 다시 쓴 역사였다.

오리지널 버전의 공연을 마친 ‘식스 더 뮤지컬’은 이달 말 한국 배우들의 공연으로 막을 올린다. 폭발적 가창력의 손승연 솔지와 같은 가수들의 캐스팅부터 뮤지컬 스타 박혜나를 비롯해 무대에서 내공을 쌓은 배우들이 캐스팅됐다. 의도치 아닌 지교 포인트가 생겼다. 오리지널 내한 공연이 평점 9.7점을 기록하며 마무리된 만큼, 팝 뮤지컬의 본질과 매력을 살리는 것은 한국어 공연의 큰 숙제가 됐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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