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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5 (화)

“영화 번역, 비평 수준까지 이른다면 AI에게 이길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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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풀’ ‘파친코’ 등 번역 황석희

에피소드 다룬 에세이집 펴내

“오역 반성엔 자존심 같은건 없어

관객과 가까운 번역가 되고 싶어”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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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희 영화번역가(44·사진)는 2017년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자막을 번역한 뒤 한 청각장애인으로부터 페이스북 메시지를 받았다. 영화의 주인공 엘라이자를 ‘농아(聾啞)’라고 번역했는데 잘못됐다는 것이었다. 그는 처음엔 억울했다. 표준국어대사전엔 ‘청각 장애인과 언어 장애인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돼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면서 장애인을 가리키는 단어는 ‘농아인’으로 번역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납득하게 됐다. 그는 제작사에 연락해 주문형비디오(VOD)라도 자막을 바꿔 달라고 요청했다. 영화사 입장에선 귀찮은 일이었지만 ‘번역 AS(애프터서비스)’로 유명한 그의 설득에 결국 그 단어는 모두 바뀌었다. 그는 지난달 17일 출간된 에세이 ‘번역: 황석희’(달)에 이 에피소드를 쓰며 딸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라고 했다. “아빠는 반성에 자존심 같은 거 없어.”

황 번역가는 4일 전화 인터뷰에서 “18년 전 번역을 시작할 때부터 최고의 번역가가 되진 못해도, 관객과 가장 가까운 번역가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영화 번역에서 ‘오역’의 기준이란 굉장히 복잡합니다. 사전적 정의를 따라도 틀릴 수 있고, 연출자의 의도를 유추해야 하니까요. 다만 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으로 번역 논란에 대해 관객을 설득하고 소통하려 해요.”

그는 원작 속 선을 넘나드는 말장난을 한국어의 말맛과 동시대 문화적 특성을 반영한 이른바 ‘초월 번역’으로 주목받았다. 영화 ‘데드풀’(2016년)에서 농담으로 가득한 오프닝 크레디트를 한국식 욕설로 번역한 것이 대표적이다. 출연진을 가리킨 자막 ‘God’s perfect idiot’를 ‘신이 내린 또라이’로, 제작자를 가리킨 자막 ‘Asshats’를 ‘호구들’이라고 번역해 화제가 된 것이다. 또 ‘스파이더맨: 홈커밍’(2017년)에선 스마트폰 문자 속 이모지인 ‘스마일’과 ‘주먹’을 자막에 넣었다. 가로 자막 한 줄에 넣을 수 있는 글자 수인 12자를 최대한 활용한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그는 “자막은 넓은 캔버스(화면 전체)가 아닌 작은 울타리(화면 맨 아래)에 넣어야 하니 물리적 한계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며 “여태 번역한 영화 자막 100만 개 중 실험적 시도는 10개 안팎에 불과하다. 전통적 틀에서 벗어날 땐 오히려 더 주의를 기울인다”고 했다.

동아일보

신간엔 그가 영화계에서 일하며 겪은 여러 에피소드가 담겼다. 그는 2022년 드라마 ‘파친코’에선 자막이 아니라 대사 번역을 맡았다. 제작사가 애플TV플러스고, 배경은 한국인 만큼 영어로 쓰인 대사를 한국어로 바꿔야 했다. 그는 “과거 해외 작품에선 한국인이 듣기엔 말도 안 되는 한국어 대사가 많았다”며 “해외 제작사들이 한국을 배경으로, 한국인이 등장하는 작품을 내놓으면서 대사 번역으로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고 했다.

생성형 인공지능(AI) ‘챗GPT’가 번역하는 시대, 영화번역가의 미래는 있을까.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답했다.

“번역이 올바른지, 틀린지 채점하는 수준을 넘어선다면요. (사람의) 번역이 영화의 맥락과 시대의 흐름을 어떻게 반영했는지 비평을 하는 수준까지 이른다면 AI를 이길 수 있어요.”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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