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14 (일)

[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거란 패권 넘볼 때 친송 외교 참사, 26년 전쟁 불러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고려·거란 세 차례 전쟁



중앙일보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TV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이 세간의 화제다. 모처럼 제대로 만든 사극이라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는가 하면, 회를 거듭할수록 뒷심이 딸리는 것 같아 아쉽다는 감상평도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고려 역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만은 분명하다. 지채문·하공진·양규·강민첨 등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들이 재조명된 것도 큰 소득이다. 그런데 이 전쟁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이야기를 듣는 사람도,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이 있다. 고려와 거란은 왜 싸웠을까? 당시 고려 사람들은 알고 있었던, 전쟁의 이유를 이해해야만 역사적 평가가 가능해진다.



송 치는 데 고려가 위협요소 판단

1차 전쟁 땐 서희 담판 영토 늘어

강감찬 3차 전쟁 대승 거뒀지만

4차 우려, 번국 자청 100년 평화

국제질서 전환기에는 전쟁 빈발

실리 꾀하는 중립 외교 펼쳤어야

중앙일보

KBS2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전쟁’ 중 전투장면. [사진 KBS]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고려 거란 전쟁은 993년에 시작해서 1019년까지 26년 동안 계속되었다. 거란이 침략하고 고려가 방어하는 전쟁이었다. 그럼 거란은 왜 고려를 침략했을까? 힘센 나라가 약한 나라를 침략하는 것이 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전쟁은 강대국도 커다란 손실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상대방의 숨을 끊으려면 자기 팔다리 하나쯤은 내놓아야 한다. 게다가 승리한다는 보장도 없다. 현대 전쟁에서도 공자(功者)의 군사력이 방자(防者)의 세 배가 될 때 승률이 겨우 절반이라는 것이 상식이다. 그만큼 전쟁을 먼저 일으키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침략을 당한 나라는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하지만, 전쟁을 일으킨 나라도 나름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럼 거란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양국 전쟁은 당대 세계 전쟁의 일부

거란은 916년에 야율아보기가 시라무룬 강 유역에서 건국했다. 그보다 10년 전 당나라가 멸망하고 동아시아에 패권국이 없는 상태였다. 그 권력의 공백기에 여러 국가·부족들이 패권을 다투었다. 이 분열기를 중국사의 5대·10국 시대(907~960)라고 부른다. 거란의 건국도 이 분열기의 혼란을 틈타 가능했다.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강대국의 기틀을 마련한 후 중원으로 진출했다. 그 사이에 송이 5대·10국을 통일하고 거란과 대립했다.

송과 거란은 동아시아의 패권국이 되기 위해서 싸웠다. 당 멸망 후 자신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그 여파가 고려에 미쳐왔다. 이런 의미에서 고려 거란 전쟁은 동아시아 세계 전쟁의 일부였다. 이 관점에 서야 눈앞의 전쟁보다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다. 주변의 두 강대국이 싸우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답은 정해져 있다. 중립을 지키며 실리를 극대화하는 외교를 해야 한다. 문제는 그것이 쉽지 않다는 데 있다. 두 강대국이 서로 자기편에 설 것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고려는 뜻밖의 선택을 했다. 망설임 없이 반거란 정책을 폈던 것이다.

태조 25년(942) 거란에서 낙타 50필을 선물로 보내와 친선의 뜻을 보였다. 그런데 고려는 거란 사신을 섬에 유배하고 낙타는 개경 만부교 아래 매어 굶겨 죽였다. 고려의 이 과격한 조치를 두고 해석이 분분하다. 『고려사』에는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나라라서 그렇게 했다고 되어 있고, 실학자 성호 이익은 거란이 고려의 북진정책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모두 일리가 있지만, 그보다는 거란이 그렇게 강해질 줄 몰랐을 것이란 설명이 더 와닿는다. 송과 거란이 싸우면 면적도 넓고 인구도 훨씬 많고 군사도 훨씬 더 많은 송이 이길 것으로 예상했을 것이다.

예상과 달리 거란이 송에 승리해

중앙일보

서울 서초구 국립외교원에 있는 서희 동상. 서희는 거란의 1차 침략 당시 거란군 지휘관 소손녕과 외교 담판을 벌였다. [사진 이익주]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고려의 예상이 빗나갔다. 986년 송 황제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거란을 공격했다가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바로 전해에 송의 협공 제안을 거부한 일이 있던 고려로서는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제안이 결국 빌미가 되었다. 거란이 송을 공격하기에 앞서 고려를 침략했던 것이다. 고려와 송이 손잡을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993년, 거란의 1차 침략으로, 고려 외교의 실패가 부른 전쟁이었다.

곧 서희와 소손녕 사이에 협상이 시작됐다. 먼저 소손녕이 말했다.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 것인데 너희가 침범했다. 또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면서 바다 건너 송을 섬기기 때문에 오늘의 출병이 있게 된 것이다. 땅을 떼어 바치고 사신을 보낸다면 무사할 것이다.” 소손녕은 삼국 통일을 인정하지 않고 신라가 백제를 병합했다고 생각했다. 고구려는 당이 차지했으니 그 영토가 거란 것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동시에 고려의 친송 정책을 문제 삼았는데, 실은 이것이 핵심이었다.

서희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우리가 바로 옛 고구려이다. 그래서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하고 평양에 도읍했다. 영토 문제를 따진다면 거란의 동경이 우리 땅이 돼야 하는데, 어떻게 우리가 침범했다고 하는가? 또 압록강 안팎이 우리 땅이지만 지금 여진이 그곳에 살면서 길을 막고 있어 바다를 건너기보다 더 어렵다.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 영토를 돌려준다면 어찌 (거란에) 사신을 보내지 않겠는가?” 역사계승 문제는 국호를 가지고 단박에 제압하고, 고려 영토를 압록강까지 확장하는 조건으로 거란과 통교하겠다는 말이었다. 그러자 소손녕은 군대를 돌렸다. 이 전쟁에서 고려는 영토를 얻고, 거란은 송과의 전쟁을 앞두고 잠재적 위협 요소를 제거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고려 1차 전쟁 후에도 송과 교류

중앙일보

서울 관악구에 위치한 낙성대(落星垈)는 강감찬이 태어날 때 별이 떨어졌다고 해 이름이 생겨났다. 정확한 탄생지는 알 수 없고, 추정되는 곳에 안국사(安國 祠)라는 사당이 있다. [중앙포토]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거란은 송과의 전쟁에서 1004년에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이것은 당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100년 만에 거란 중심으로 재편되었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거란에 마지막 남은 숙제가 있었다. 바로 고려였다. 1차 전쟁 이후 고려는 송과 계속 교류하고 있었고 때로는 군사적 협력을 시도했다. 거란은 고려가 적대하고 있다고 비난했지만, 고려로서는 끝까지 송을 이용해서 거란을 견제하려는 당연한 행동을 한 것이었다. 거란 중심의 새로운 국제질서에서 고려의 위상이 분명하게 정해지지 않았고, 이 때문에 거란은 2차, 3차 침략을 감행했다.

고려 거란 2차 전쟁은 양규와 하공진의 활약으로, 3차 전쟁은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고려는 2차 전쟁 후 송과 협력을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이 전쟁을 고려와 거란의 일대일 구도가 아니라 송·여진까지 포함하는 동아시아 전체 그림 속에서 파악하고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송의 거부로 공동 전선을 만드는 데 실패하고 단독으로 거란을 상대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벌어진 3차 전쟁에서 고려가 대승을 거두었다. 거란군 10만 명 중 겨우 수천 명이 살아 돌아갔다고 할 정도이니, 고려의 승리, 거란의 패배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간다.

국제 질서 대응 따라 전쟁·평화 갈려

중앙일보

신재민 기자


그런데 그 승리는 고려에 무엇을 남겼을까? 고려도 수많은 군인이 전사했고, 민간인은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끌려갔으며, 전쟁터가 된 국토는 황폐해졌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고려는 전후 복구에 매달려야 했고, 곧 닥쳐올 거란의 4차 침략을 걱정해야 했다. 거란은 힘들여 구축한 국제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고려 침략을 포기할 수 없었다.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고려가 단안을 내렸다. 귀주대첩 꼭 1년 뒤인 1020년 2월 거란에 사신을 보내 표문(表文)을 올리고, 번국(藩國)을 칭하며,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패권국의 위신을 세워주며 전쟁을 피하려 한 것이었다. 전쟁이 역시 부담스러웠던 거란은 말 그대로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었고, 이렇게 두 나라의 전쟁은 끝이 났다. 이후 고려는 거란으로부터는 평화를, 송으로부터는 선진 문화와 경제적 이익을 얻으며 12세기 100년 동안 평화를 누렸다.

거란은 왜 고려를 침략했을까? 자신이 중심이 되는 국제질서를 만들고 지키기 위해서였다. 고려가 이 점을 파악했기 때문에 외교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역사 속의 전쟁은 대부분 국제질서의 전환기에 일어났다. 수·당의 고구려 침략, 몽골의 고려 침략,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다 그랬다. 결국 국제질서의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전쟁을 부를 수도, 막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고려 거란 전쟁에서 지켜봐야 할 것은 고려가 얼마나 잘 싸웠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넓은 시각으로 세계를 보면서 실리 외교로 전쟁의 피해를 줄이고 평화를 지켰느냐이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