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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2 (토)

여친·배달원 셀카에 '덜미'…필리핀 다 뒤진 46억 횡령범 체포작전 [사건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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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도피 건보 팀장, 경찰 체포 막전막후]
현지 여자친구 SNS서 은신처 단서 발견
세탁물 배달원과 함께 찍은 셀카로 특정
범행 인정했지만 횡령액 39억은 미회수
한국일보

46억 원을 횡령해 해외로 도피한 국민건강보험공단 전직 직원 최씨가 1월 9일 오후 필리핀 마닐라의 한 리조트에서 경찰에 체포되기 전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있다. 경찰청 제공


올해 1월 9일 오후 6시(한국시간). 필리핀 수도 마닐라의 한 고급 리조트에 신분을 숨긴 십여 명의 경찰관이 숨어들었다. 한 남성을 찾기 위해서다. 리조트 주차장과 로비 등 밖으로 나가는 통로를 원천 봉쇄한 경찰관들은 로비 곳곳에서 5시간을 숨죽이며 잠복했다. 드디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기다리던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란 옷에 흰 반바지, 파란색 가방을 들었다. 저 놈이다!

"우리가 왜 왔는지 알죠? 이제 집에 갈 때가 됐어요."

경찰관들은 곧바로 다가가 신원을 확인하고 수갑을 채웠다. "체포될 거예요"라는 말과 함께 경찰관이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자 남성은 당황한 낯으로 "아" 외마디 신음을 냈다. 이 한국인은 46억 원을 횡령해 필리핀으로 도주한 국민건강보험공단 재정관리팀장 최모(45)씨. 건보공단 역사상 최대 횡령 사건의 피의자 최씨의 필리핀 도피 생활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도망 1년 4개월 만이다.

건보공단 전산망 조작해 범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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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건강보험공단 표지석. 건보공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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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202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건보공단 재무 업무를 관리하던 최씨는 그해 4월부터 9월까지 약 5개월간 내부 전산망을 조작해 46억 원을 횡령했다. 가상화폐 투자에 실패하며 빚이 늘자, 빚을 갚고 또 가상화폐에 돈을 투자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

최씨는 건보공단 시스템의 허점을 이용했다. 재정관리실 근무 중 채권관리 업무를 맡는 과정에서 채권자인 요양기관(병의원)의 계좌 정보를 알게 된 최씨는, 이를 조작해 진료 비용을 본인 계좌로 일곱 차례 송금했다. 건보공단은 병의원의 의료법 위반 혐의를 포착하면 진료비 지급을 보류할 수 있는데, 최씨가 이러한 허점을 파고들어 17개 요양기관의 진료비를 빼돌린 것이다.

국민들이 십시일반 낸 건보료가 수십억 원 빠져나갔음에도 건보공단은 수 개월 동안 횡령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건보공단 관계자는 "당시 지출을 결정하는 부서와 실제로 돈을 송금하는 부서가 분리돼 있었다"며 "그렇기에 지출 내역이 실시간으로 공유되지 않아 범행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씨의 범행은 2022년 9월이 돼서야 드러났다. 공단은 지출 내역을 점검하는 과정에서 돈이 예정대로 송금되지 않았음을 알아차렸고, 같은 달 22일 부랴부랴 최씨를 경찰에 고발했다. 그러나 이미 최씨가 돈을 가상화폐로 환전하고 휴가를 내 필리핀으로 도주한 뒤였다.

경찰·인터폴·외교부 공조로 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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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폴 수배의 종류. 국제형사기구 홈페이지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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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접수되자 경찰은 곧바로 합동수사팀을 꾸려 최씨를 쫓았다. 해외 도피였기에 수사팀 규모도 컸다. 경찰청 국제형사기구(인터폴) 국제공조계, 강원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 경기남부청 인터폴추적팀, 주필리핀 한국대사관과 한국인 사건을 전담하는 코리안데스크가 참여했다. 필리핀 현지 경찰과 이민국도 협력했다.

합동수사팀은 현지 추적과 첩보 입수로 역할을 나눠 추적에 돌입했다. 인터폴 국제공조계 지휘하에 코리안데스크는 필리핀 현지에서 동분서주하며 최씨의 흔적을 쫓았다. 강원청과 경기남부청은 주로 첩보와 정보를 분석하는 역할을 맡았다. 강원청은 최씨의 가상화폐 및 클라우드 계정에 대한 압수 영장을 신청하고 위치 정보를 특정하며 수사망을 좁혔다. 경기남부청도 최씨와 주변인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샅샅이 뒤지며 흔적을 찾아나갔다.

경찰은 인터폴에 요청해 적색수배서를 발부받기도 했다. 적색수배서는 인터폴에 가입한 회원국이 공유하는 수배서로, 신병 인도가 요구되는 수배자의 소재를 특정하고 체포하는 역할을 한다. 인터폴이 발급하는 수배서는 인물 정보조회를 요청하는 청색수배서, 경고성으로 발급하는 녹색수배서와 실종자를 찾기 위한 황색수배서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적색수배서는 이 중 가장 높은 등급에 해당한다.

인터폴이 적색수배서를 발부하면 범인이 도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국가는 수배자를 위험 인물로 파악해 신분 상태를 불법으로 만든다. 신분을 불법체류자 혹은 위험 인물로 만들어 추방하거나 관찰하는 식으로 국내 송환의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경찰은 인터폴과 공조해 필리핀 계좌 정보와 인터넷주소(IP), 출입국 기록 등을 확인했다.

외교부도 손을 보탰다. 한국대사관은 1월 6일 필리핀 법무부 장관에 협조 서한을 보냈다. 같은 달 8일에는 필리핀 총영사가 직접 필리핀 이민청장과 면담해 협조를 구하기도 했다. 인터폴공조계에서 근무하는 한 경찰관은 "외교부가 수배자 검거에 관여하는 게 일반적인 일은 아니나,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해 적극적으로 나서줬다"며 "수사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체포 위한 갖가지 아이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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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억 원을 횡령해 해외로 도피한 최씨(왼쪽)가 1월 9일 오후 필리핀 마닐라의 한 리조트에서 현지 경찰에 체포됐다. 경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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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수사팀이 꾸려졌음에도 최씨의 은신처를 특정하긴 쉽지 않았다. 필리핀은 7,600개가 넘는 섬을 가진 국가였기에 수배자가 외딴섬에 숨어버리면 위치를 쉽사리 특정할 수 없다. 실제로 1년 넘게 이어진 추적 과정 동안 최씨의 은신처로 앙헬레스, 마닐라, 세부 등 필리핀 내 여러 도시가 여러 차례 거론되는 상황이 반복됐다. 최씨가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가상화폐를 필리핀 화폐인 페소로 환전한 점도 어려움으로 작용했다.

수사가 지난하게 이어지던 가운데, 결정적 단서는 의외의 곳에서 발견됐다. 최씨가 현지에서 사귄 여자친구가 SNS에 게시한 사진이 단서가 됐다. 최씨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경찰은 가짜 계정을 만들어 최씨 여자친구의 SNS를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지난해 말 최씨 여자친구가 올린 셀카 배경에 드러난 한 리조트의 모습을 포착, 구글맵과 대조한 뒤 최씨의 위치를 마닐라로 특정했다. 당시 사건을 담당한 경찰관은 "필리핀 사람들이 SNS를 즐겨 한다는 점을 이용해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어렵게 리조트를 찾았음에도 검거까진 아직 하나의 관문이 더 남아있었다. 바로 최씨가 정확히 어느 방에 묵는지를 알아내는 일이었다. 호실이 정확히 특정되지 않으면 임시 체포영장 역할을 하는 구인장을 발부할 수 없기에 경찰은 이를 알아내고자 머리를 맞댔고, 곧 리조트 출입이 자유로운 세탁물 배달원을 활용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경찰은 배달원을 포섭해 협조를 구하고 최씨의 방이 어딘지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배달원은 기대 이상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최씨를 만난 배달원은 기지를 발휘해 휴대폰으로 함께 셀카를 찍었고, 사진을 통해 신원을 확인한 경찰은 곧바로 검거를 위한 작전에 돌입할 수 있었다.

체포 D-데이인 1월 9일. 리조트 측으로부터 건물 내 동선 정보를 얻은 경찰은 검거를 위해 탈출 경로 곳곳에 잠복했다. 잠복을 시작한 시점으로부터 5시간이 지나자 최씨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모습을 드러냈고, 경찰은 곧바로 최씨를 붙잡아 수갑을 채울 수 있었다.

"횡령액 선물투자로 다 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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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억 원을 횡령해 해외로 도피한 최씨가 1월 17일 국내로 송환되고 있다. 경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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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거 후 송환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당초 경찰은 국내 송환까지 약 한 달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필리핀 대사관과 코리안데스크 담당관이 필리핀 이민국과 조기 송환을 위한 교섭에 나서며 송환 시점은 1월 17일로 앞당겨졌다.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한 최씨는 "회사에 진심으로 죄송하고 국민께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사전자기록위작, 위작사전자기록행사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최씨는 2월 13일 열린 첫 재판에서 자신의 혐의를 모두 인정했다. 최씨와 변호인은 검찰의 공소 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제출된 증거도 모두 동의해 법리 다툼이 없다고 밝혔다.

다만 남은 돈을 회수하긴 쉽지 않아 보인다. 경찰이 조사 당시 남은 돈의 행방에 대해 묻자 최씨는 "선물투자로 다 잃었다"고 진술했다. 건보공단이 최씨를 고발한 후 민사소송으로 계좌 압류 및 추심을 진행해, 지난해 횡령액 중 일부인 7억2,000만 원을 회수했다. 그러나 남은 39억 원을 환수할 방도를 찾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검찰은 최씨가 어딘가에 남겼을 지도 모르는 자금을 끝까지 추적한다는 방침이다. 검찰 관계자는 "나머지 횡령금의 사용처와 도피 과정에 대해 추가 수사를 이어가는 한편 범죄수익 환수에도 힘쓰겠다"고 말했다.

전유진 기자 no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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