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 민음사 |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가 영화로 돌아왔다. 소설로 나온 2015년엔 헬조선 담론이 나라를 주름잡고 있었다. 주인공 계나는 호주로 이민가면서 이랬다.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헬조선이란 유행어는 지금 없다. 헬조선병(病) 뜯어고쳐 선진 대한민국으로 도약하라. 2016년 1월 1일자 동아일보 사설 제목이다. ‘대한 늬우스’를 보는 듯한가. 하지만 진심이었다(그때 논설실에 있었기에 잘 안다).
안타깝게도 헬조선병 고치는 대신 ‘한국 비하 신조어’를 비난했던 대통령은 2017년 초 탄핵으로 물러났다. 2015년 1.24였던 합계출산율은 2023년 0.72로 뚝 떨어진 상태다. 2017년 크리스틴 라가르드 당시 IMF총재는 한국의 극단적 저출산을 ‘집단자살’이라고 했던가(그땐 1.05로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 그래서 제목을 ‘헬조선에서 킬조선’이라고 한 거다. 죄송하다. 추석을 앞두고 무시무시하게 붙여서.
● 경쟁력도 없으면서 더럽게 까다로운 MZ
소설 속 계나가 튀어나온 듯한 배우로 고아성이 등장한다. 그가 말하는 한국에선 못 살겠다는 이유는 경쟁력 없는 인간이어서다. 이 나라에서 ‘그런 인간은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 뭘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것도 개뿔 없고, 그런 주제에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로워요.’
영화 ‘한국이 싫어서’의 한 장면. 오른쪽이 배우 고아성이 연기한 주인공 계나. 디스테이션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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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려받은 것도 없다는 건 부모 유산만 말하는 게 아니다. 미모와 키, 아이큐와 학벌, 심지어 직업과 결혼 가능성도 ‘부모 찬스’에 비례하는 유전자계승-계급사회가 됐다. 뭘 치열하게 하지도 못한다는 건 근면 성실하지 못하다는 소리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라는, 학교 때 맞으면서 외운 국민교육헌장을 기억하는 세대로선 열불 날 판이다.
‘라떼’는 못 먹고 못 입으며 뼈 빠지게 뛰어 산업화 민주화를 이뤄냈다. 마침내 경제규모 10위권의 선진국에 도달했는데 젊은 것들은 뭐? ‘노오력’은커녕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롭다고? 영화에서 그 예로 등장하는 게 동태탕 신이다. 직장상사 동료들과 식당테이블에 앉은 계나가 메뉴를 고르는 사이, 상사가 “동태탕!”을 외치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동태탕 4인분으로 통일되는 장면이다. 심지어 ‘융통성’이라는 명분으로 일감몰아주기 서류조작까지 요구하는 회사를 견딜 수 없다. 계나의 빡치는 표정 위로 나이든 한국남자의 못 말리는 꼰대근성, 광복 80년이 다 되도록 그대로인 조선의 전근대성이 겹쳐지고 있었다. 진짜 못살겠다. 이런 나라에선.
● 지옥철 타보고 “저출산” 소리 하라
소설이든, 영화든 계나의 지하철 출퇴근은 ‘탈조선’의 주요 이유다. 계나의 눈엔 대한민국 저출산의 큰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서 출퇴근할 때 계나는 매일 울면서 다녔다. ‘여자들더러 아이 많이 낳으라는 사람들은 출근 시간에 지하철 2호선 한번 타봐야 해. 신도림에서 사당까지 몇 번 다녀 보면 그놈의 저출산 이야기가 아주 쏙 들어갈 텐데. 그런데 그런 소리 하는 인간들은 지하철을 타고 다니지 않겠지.’
인파로 붐비는 서울 신도림역. 동아일보 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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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나는 한국선 2등 시민이다. 남친 지명은 그렇지 않다. 오랜 취준생 시절 잠깐 계급이 역전됐어도 강남 출신이고 아버지가 교수이며 남자인 지명은 “조금만 돈이 있으면 한국처럼 살기 좋은 곳이 없다”고(영화에선 “한국은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기회의 땅”이라고) 믿는다.
문제는 ‘조금만 돈이 있으면’이라는 기준이 상당히 높다는 사실이다. 소설에서 계나는 ‘남편이랑 나랑 둘이 합쳐서 한국 돈으로 1년에 3000만 원 만 벌어도 돼’ 그런다. ‘한국적 삶’을 규정하는 핵심적 속성이 바로 ‘주류·표준·평균에 속한 이에게 제공되는 엄청난 편의성’이다.한윤형이 최근 ‘상식의 독재’에서 정의한 바다.
● 주류·표준·평균 바깥에는 잔인하다
여기서 주류는 연 소득 1억 원 이상의 대졸자를 말한다. 대기업, 공무원이나 공기업 정규직원들에게 한국은 꽤 살기 괜찮은 나라다. 표준은 평균보다 높은 연봉 5000만 원 이상의 대졸자, 평균은 연봉 3000만 원대 후반의 직장인 정도를 말한다. 그러나 ‘그 바깥 다양한 삶’에 대해 한국 사회는 철저하게 무신경하고, 배려 없고, 때로 잔인하다.
그래서 한국인은 스스로가 한국 사회의 표준 이상이 돼야 한다는 ‘표준압’을 느낀다고 한윤형은 지적했다. 이게 바로 바로 한국에서의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요인이다. 나는 일류대학을 못 나왔지만 내 자식은 일류대학(요즘은 의대!) 가야 한다며 아이를 들볶고, 남들처럼 강남에 살아야 한다며 남편을 들볶는다. 자녀를 번듯하게 키우지 못할 바엔 출생 자체를 포기한다. 그러니 합계출산율이 저 꼴이고, 자살률은 2023년 현재 OECD 38개국 중 1위가 된 것이다.
자기 경쟁력을 키우려 혼자 열심히 뛰는 데 그치면 차라리 낫겠다. 남들이 어찌 살든 나만 만족하면 상관없다. 그러나 계나가 보기엔 남의 불행이 내 행복의 원동력인 나라가 한국이다. 가게에선 진상 떨고, 며느리 괴롭히고, 부하 직원에게 갑질해야 비로소 행복해진다. 한국선 경쟁력 없으면 사람대접도 안 해주지만 호주는 그렇지 않아서 떠나는 거다(영화에선 뉴질랜드. 더 여성친화적이란다). 알바 인생도 나쁘지 않고, 방송기자(지명의 직업)랑 버스 기사가 월급 차이도 별로 안 난다. 무엇보다 호주 국민이 되면 놀고 있어도 실업 연금 따박따박 나오고 큰 병 걸리면 병원비 다 지원돼 좋다(그러나 월급의 3분의 1정도가 세금으로 나간다는 건 밝히지 않았다).
● 빅토르 안-안세영이 분노한 전근대적 킬조선
동아일보 기자 출신 총명한 작가 장강명은 치열한 취재와 벽돌책 독서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출간 당시 그는 한 인터뷰에서 빙상 스타 빅토르 안(안현수)의 러시아 귀화를 계기로 제목부터 지었다고 밝혔다. 파벌 논란으로 복잡했던 안현수는 2014년 소치 올림픽에서 러시아에 금메달을 3개나 안겨줬다. 한국 선수들은 대부분 탈락했는데 뉴스 사이트 댓글에선 안현수의 선택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이었다.
특히 청년들이 한국 빙상계를 한국 사회 전체의 모습으로, 빙상연맹을 한국 정부의 모습으로 보는 듯했다는 장강명의 말은 올해 파리올림픽 배드민턴 금메달리스트 안세영과 묘하게 겹쳐진다. 금메달을 딴 직후 안세영은 “제가 목표(금메달)을 향해 달려온 원동력은 분노였다”며 배드민턴협회의 부조리를 터뜨렸다. “이제야 숨이 쉬어진다”면서 협회가 너무 많은 걸 막고 있었다고 했다.
안세영이 8월 5일(지시간) 2024 파리올림픽 배드민턴 여자 단식 결승전에서 중국 허빙자오를 이긴 뒤 기뻐하는 모습. 파리=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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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10년이다. 빅토르 안으로부터 강산도 바뀐다는 10년이 지났는데도 스포츠계는, 한국 사회는 달라지지 않았다. 금메달을 따고 나서야 할 말을 할 자격이 생길 만큼, 그러고도 ‘김연아급이나 되는 줄 아느냐’는 협회 공격이나 받을 만큼 전근대적 킬조선은 국가대표 선수들을 숨도 못 쉬게 옥죄고 있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협회 점검 결과 횡령 배임 혐의가 적잖게 드러났다. 안세영에게는 중국 귀화 제의까지 왔다고 했다. 의료대란 와중에 한국을 떠나려는 의사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들은 좋겠다. 떠날 수 있어서.
● 이번 추석엔 모두의 자존심을 배려해주면 어떨까요
이 슬픈 ‘한국이 싫어서’를 장강명은 애국소설이라고 생각하며 썼다고 했다. 자살이나 이민이 해결책은 아니라면서 자신이 속해 있는 한국은 ‘복원시켜야 할 공동체’라고 했다. 영화를 만든 장건재 감독도 “각자의 위치에서 지옥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라고 밝혔다.
맞는 말씀이다. 모두가 계나처럼 이 나라를 떠날 순 없는 일이다. 그래서 정치를 하는 사람도 있고, 댓글을 달기도 하고, 개딸이 되기도 한다. 굳이 드라마에서 대안을 찾는다면 2022년 방영된 ‘나의 해방일지’가 있다. 흰자위 같은 수도권 도시 산포에서 노른자위 서울로 어렵게 출퇴근하는 염미정은 구 씨에게 ‘추앙’을 요구하고 또 받으면서 ‘거지같은 자기 인생이 채워지는 것’을 경험한다. 덕분에 자신이 사랑스러워진 미정은 구 씨에게 죽이고 싶던 사람한테도 “그렇게 웃어. 그렇게 환대해”하고 일러준다.
화가 나거나 불안한 분이 계신가. 다시 계나 얘기로 마무리하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주변 사람들이 많이 웃고 표정이 밝은 걸 보면 기분이 좋아져. 매일 화내거나 불안해하는 얼굴들을 보면서 살고 싶지 않아. (중략) 난 내가 누구를 부리게 되거나 접대를 받는 처지가 되어도 그 사람 자존심은 배려해 줄 거’라고 했다. 우리도 한국에서 이렇게 살 수 있다. 이번 추석엔 많이 웃고, 모두의 자존심을 배려해 주면 어떨까. 무엇보다 아프거나 다치지 않게 조심하면서 말이다.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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