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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 (화)

尹 대통령이 신문을 읽을까 [노원명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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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2022년 4월 6일 제66회 신문의날 기념 행사에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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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이 신문을 읽는지 잘 모르겠다. 신문 독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1면부터 끝까지 샅샅이 훑는 사람, 경제면만 읽는 사람, 제목만 보고 넘기는 사람, 칼럼과 사설만 읽는 사람, 칼럼과 사설은 빼고 읽는 사람, 밑의 사람이 스크랩한 기사로 대체하는 사람…대통령은 바쁜 자리이니 스크랩이 유력해 보이는데 그 스크랩에 어느 정도 비판적인 수위의 기사가 포함되는지, 그걸 대통령이 정독하는지는 다만 짐작할 뿐이다.

자신과 다른 세계관으로 채워진 신문을 읽는 것은 사실 고역이다. 직업상 여러 스펙트럼의 신문을 읽어야 하는 나는 자주 경험하는 일이다. 세계관이 다른 것은 차치하고 사악하게 사실을 왜곡·과장하는 꼬락서니를 보다 보면 혈압이 오르고 혈당은 떨어진다. 장삼이사인 내가 그 악랄한 기사와 무슨 상관이 있겠나. 신문이 겨냥하는 최종 공격 대상은 늘 대통령이다. 자기를 그렇게 조져대는 신문을 보기는 짜증스러울 것이다. 지금 모든 신문이 대통령을 조져대고 있다. 그런지 꽤 됐다. 대통령 눈에는 하나같이 왜곡·과장한 기사들뿐이다. 내기를 한다면 나는 대통령이 신문을 읽지 않는다는 쪽에 걸겠다.

신문업 종사자로서 신문 소비자에 대한 나름의 안목이 있다. 스타일을 보면 신문을 열심히 읽는 사람인지, 대충 보는 사람인지 감이 온다. 내 기준에 윤 대통령은 원래 신문을 잘 안읽을 유형이다. 그는 자기 확신이 강하고 고집도 세다. 그때그때 시류를 타는 신문의 얄팍한 주장에 공감하기 쉽지 않은 성격이다. 대통령이 된 후에 그런 성격은 더 굳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지금 그의 주변에는 전문가 관료집단이 있고 그들은 신문의 비판에서 흠을 찾아내는데 이골이 난 사람들이다. ‘뭣도 모르는 것들이...’

사실 신문은 ‘뭣도 모르는 것들이’ 만드는 어설프고, 가끔 위태롭기도 한 ‘팸플릿’에 가깝다. 찌라시라는 말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수백 년 살아남은 이유는 그것이 ‘뭣도 모르는 것들’의 의견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상식, 여론이라는 것은 ‘뭣도 모르는 사람들’이 갖는 견해의 총합이라 할 것인데 신문은 그것을 전달하는 것에 소명이 있는 산업이다.

신문을 읽을 때 일관성에 집착하면 허무해진다. 언제는 응급실 뺑뺑이 르포를 하면서 ‘이게 다 의사를 덜 뽑아서 그렇다’고 하더니, 지금은 같은 응급실 뺑뺑이를 보도하면서 ‘괜히 의대증원을 하는 바람에 이 사달이 났다’고 한다. 표변하는 여론을 따라가다 보니 생기는 일이다. 이런 저널리즘이 좋은지는 장차 고민하기로 하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론은 고정돼 있지 않다는 것이고, 대통령은 그 여론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결과 최선과 현실적 한계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야만 한다. 그것은 그리 단순하지 않고 정답도 없다. 대통령은 복잡성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는 직업이다.

윤 대통령은 대통령치고는 단순한 성격 같다. 대통령 연설문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자유 자유 자유...온통 자유의 강물이 넘쳐흐른다. 밀턴 프리드먼을 사숙했다는 것으로 미뤄 이때 자유는 신자유주의적 자유에 가까워 보인다. 어쨌거나 윤 대통령은 선악, 그리고 진실과 거짓이 확실히 구분되는 이념형적 세계관을 지향하는 성격이다.

아마도 대통령이 읽었을 ‘선택할 자유’와 ‘자본주의와 자유’ 두 책은 프리드먼이 대중을 상대로 쓴 책인데 경제학보다는 보수주의 철학서에 가깝다. 프리드먼이 펼쳐보이는 세계는 수학처럼 논리정연하다. 프리드먼은 ‘의사면허’를 폐지하라고 말한다. 면허 때문에 의사의 특권적 지위가 생겨나고 그것은 소비자 편익을 방해한다. 시장에 맡겨두면 여러 층위의 의료시장이 만들어질 것이고 돌팔이는 자연 도태된다. 수학처럼 아름다운 세계다. 프리드먼이 평생 경쟁심을 느꼈던 케인즈는 완전고용에 이르는 아름다운 세계를 펼쳐 보였다. 땅을 파게 하라, 그 다음은 땅을 메우게 하라.

윤 대통령은 이런 타이틀적 개념만 이해하고 디테일까지는 안 들어가는 성격이다. ‘너 프리드먼 알어? 내가 좀 아는데...’ 하고 만날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메타포로 이해되면 족할 프리드먼의 극단적 주장을 금과옥조처럼 현실에 꿰맞추려 한다. 그가 생각하는 세상은 정돈되고 정답이 정해져 있는 세계다.

그런 그에게 기본적으로 하루살이이고 그때그때 달라지는 신문의 주장이 성에 찰 리가 없다. 거기다 요즘은 아부하는 신문도 없다. 무슨 재미로 신문을 읽겠는가. 윤 대통령의 임기가 막 시작되었을 즈음에 나는 그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썼다. “신문이 가르치는대로 따라 할 필요는 없다. 신문은 욕하면서 읽는 것이다(정권이 망하고 싶으면 신문이 하라는 대로 하면 된다는 농담도 있다). 신문은 다만 여론을 끊임없이 일깨운다. 여론은 변덕스럽고 틀릴 때가 많지만 그 자체로 중요하다. 대통령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현실의 여론 사이에서 결단하는 존재다. 균형감이 필요하다.”

지금 한마디 덧붙이자면 대통령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힘든 자리지만(직언을 싫어하는 성격이라면 더더욱) 신문을 읽으면 어느 정도 가능하다. 신문에는 항상 대통령에 대한 기대와 불만이 뒤섞여 표현되고 그 배합비율은 여론 흐름에 따라 달라진다. 문장에서 응축된 분노, 한심, 경멸이 느껴지는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물론 임기 내내 그런 신문은 제외하고). 거기서 더 달리면 위험해진다. 여러 신문을 매일 보는 내 눈에 지금 꽤 위험한 상황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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