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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8 (일)

헌법재판의 이론적 기틀 마련… “민사소송법의 泰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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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초대 헌법재판관 이시윤 前 감사원장 별세

조선일보

이시윤 전 감사원장이 2010년 1월 서울 강남구 역삼동 법무법인 대륙아주 사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 하는 모습.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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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사회가 분열된 상황에서 사법부 판결에 대해 각자 입장에서 유리할 땐 박수를 보내고, 불리할 때는 원망하는 모습을 우려하셨습니다. 이럴 때 법조인들이 더 분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조재연 전 대법관은 고인(故人)에 대해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법조계를 걱정하시던 분”이라고 회고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재판관이었던 이시윤(89) 전 감사원장이 지난 9일 세상을 떠났다. 그가 국내 민사소송법과 민사집행법의 일인자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이 전 감사원장은 헌법재판소의 이론적 기틀을 마련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법조인들에게는 그가 떠났다는 소식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 전 감사원장은 1974년 판사 시절 민사 재판 과정에서 벌어지는 여러 문제를 연구하자며 ‘민사실무연구회’를 만들었다. 법원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법관 연구 모임이다. 1983년 판사 부임 첫해 이 전 감사원장 권유로 이 모임에 들어갔다는 민일영 전 대법관은 “일본법을 베끼기에 급급하던 시절 독일과 미국 등 선진국 학설과 판례를 갖고 한국의 민사소송법을 정립했던 ‘큰 별’이 졌다. 고인은 국내 민사소송법의 태두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법정에선 소송 관계인들이 제대로 준비를 못 해오면 강하게 꾸짖을 정도로 엄격한 분이었지만, 제가 쓴 글을 보내면 일일이 답장을 할 정도로 후배들을 챙기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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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윤 전 헌법재판관. /헌법재판소


이 전 감사원장은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1958년 제10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광주·서울고법 부장판사와 춘천·수원지법원장 등을 지냈다. 판사 생활 중 서울대 등에서 6년간 민사소송법을 가르쳤다. 1988년 헌법재판소가 설립된 후 초대 헌법재판관을 맡았고, 1993~1997년 16대 감사원장을 역임했다. 조재연 전 대법관은 “대학생 시절 고인의 민사소송법 특강을 들었는데, 학생들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주기 위해 열정적으로 강의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이 전 감사원장은 이론과 실무 모두 깊이 연구한 법조인이었다. 민사소송법에 ‘신의성실의 원칙’을 도입하는 등 민법과 민사소송법 발전에 기여했다. 그가 1982년 펴낸 ‘민사소송법’은 법학도라면 누구나 공부했을 정도의 교과서이자 필독서였다. 박찬운 한양대 로스쿨 교수는 “사법고시 공부할 때 산 고인의 민사소송법 책을 40년 넘게 갖고 있다. 제자들에게 ‘법학 공부에 왕도가 없다’며 보여주는 책”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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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윤 전 감사원장이 펴낸 '민사소송법'.


특히 이 전 감사원장은 초대 헌법재판관으로서 헌재의 이론적 기틀을 세웠다. 독일의 헌법재판 제도를 연구한 그는 초대 조규광 헌재소장을 설득해 헌법재판을 국내에 도입하는 데 힘썼다. 헌법재판관으로서 권리구제형 헌법소원 1호 사건의 주심을 맡아 법원을 통하지 않고 직접 헌법소원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결정을 내렸다. 또 1993년 7월 국제그룹 양정모 전 회장이 낸 헌법소원 사건의 주심으로, 5공화국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지시한 국제그룹 강제 해체 작업에 대해 위헌 결정도 내렸다. 대통령의 통치 행위에 대한 헌재의 첫 위헌 결정이었다. 신봉기 경북대 로스쿨 교수는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헌재에 처음 들어갔을 때 재판 실무를 직접 혼을 내시며 가르쳐주셨다. 제 성장에 큰 힘이 되어주셨는데 가슴이 아프다”고 적었다.

이 전 감사원장은 헌법재판관 재임 중이던 1993년 12월 김영삼 정부의 감사원장으로 임명됐다. 삼풍백화점·성수대교 붕괴 등 대형 사고 현장을 직접 다니며 조사 및 방지 활동을 벌였다. 감사원장 퇴임 후엔 한국민사소송법학회 회장을 지냈고, 경희대 법대 교수와 법무법인 대륙아주 고문 변호사 등으로 활동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이광득·항득씨와 며느리 김자호·이선영씨, 손녀 이지원씨, 손녀사위 류성주씨 등이 있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12일 오전 8시. (02)2227-7500

[송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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