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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2 (토)

‘금리 하락’ 베팅한 美 장기채 투자자… 돌아온 관세 전쟁에 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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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 서학 채권개미의 시대

美 채권 투자액 2년 새 8.7배로 증가… 연준 금리 인하 기대감에 자금 몰려

작년 트럼프 당선 후 수익률 악화… 1기에 이은 보호무역주의 등 영향

인플레이션 공포에 채권 금리 상승… 2기 재정적자 축소 기조엔 차이

국채 발행 금리 낮출 가능성 있어… “금리-환율 등 변동 고려해 투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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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채권에 베팅한 ‘서학개미들’

국내 개인 투자자들의 미국 채권 투자 규모가 지난해 말 기준 113억 달러(약 16조 원)를 넘어섰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당선 이후 미 국채 금리가 오르면서 투자 수익률은 하락, 투자자들의 근심이 깊어지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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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이 미국을 중심으로 해외 주식에 투자한 ‘서학 개미’의 해였다면, 2024년은 해외 채권에 투자한 ‘서학 채권개미’의 해라고 할 만했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해외 주식에 직접 투자하기 시작한 개인투자자들이 채권으로까지 영역을 넓혔다.

한국예탁결제원이 보관 중인 한국 투자자들의 미국 채권 규모는 지난해 말 기준 113억116만 달러(약 16조3731억 원)에 달한다. 2022년(12억9063만 달러)과 비교하면 2년 만에 8.7배로 늘었다. 미국 장기채에 투자하는 상장지수펀드(ETF)의 순자산총액 규모도 빠른 속도로 늘었다.

미국 금리 인하 가능성에 무게를 둔 투자자들의 발길이 채권으로 몰렸던 것이다. 실제로 코로나 엔데믹을 거치며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급격하게 높였던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물가가 잡힐 기미가 보이자 지난해 하반기(7∼12월)에만 세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인하하며 투자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듯했다. 채권 금리 하락은 가격 상승을 의미한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 복귀하며 상황이 달라지는 모습이다. ‘사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는 관세’라고 말해 온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대선에서 승리하자마자 미국 장기채 금리가 뛰었다. 관세가 유발할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 탓이었다. 취임을 앞둔 지난달 14일에는 미 국채 30년물 금리가 5% 가깝게 치솟기도 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 불법 이민자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대규모 추방에 나섰다. 또 취임 한 달도 채 되기 전 캐나다, 멕시코, 중국, 유럽연합(EU) 등을 대상으로 한 통상 전쟁에 불을 붙였다. 관세 전쟁이 물가를, 불법 이민자 추방은 임금 상승을 자극할 수밖에 없다.

이에 서학 채권개미들의 발등에도 불이 떨어졌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에도 관세 정책이 채권 금리를 끌어올린 바 있다(채권 가격 하락). 1기보다 더 빠르고, 광범위해진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통상 전쟁이 채권 시장에 가져올 파급 효과를 분석하기 위해선 트럼프 1기에는 어땠는지, 그때와 지금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를 살펴봐야 한다.

● 금리 인하 기대감에 미국 장기채 투자 크게 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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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들어 만기가 긴 미국 채권의 투자 매력에 눈을 뜬 투자자들이 적지 않았다. 박주한 삼성증권 채권상품팀장은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제로금리’와 ‘금리 급상승기’를 경험한 투자자들이 장기채의 매력을 알게 됐다”며 “이자 소득에만 세금이 부과되고 매매할 때는 세금이 없다는 점도 실질 수익률을 높여준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미국 물가가 서서히 잡혀가며 기준금리가 떨어질 것이란 기대가 커졌다. 연준이 금리를 인하하면 미국 상무부나 기업들이 새롭게 발행하는 국채와 회사채 등의 금리도 낮아진다. 그 결과 신규 채권보다 높은 금리로 발행된 기존 채권의 가격이 오르게 된다. 장기채 투자는 만기까지 받을 수 있는 이자(쿠폰)보다는 금리 변동에 따른 시세차익을 목표로 한다.

2023년부터 기술주를 중심으로 미국 증시가 고성장하며 역으로 기대수익률이 낮아진 것도 비교적 안전한 채권으로 시선을 돌리게 만들었다. 자산운용업계 관계자는 “서울 강남 등에 거주하는 자산가를 중심으로 해외 채권에 투자해 재미를 봤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지면서 미국 채권을 찾는 투자자들이 늘었다”고 전했다.

서학 개미들의 ‘미 국채 사랑’은 미국 장기채에 투자하는 ETF들의 규모 변화에서도 나타난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5일 한국투자신탁운용의 ETF인 ‘ACE 미국30년국채액티브(H)’의 총자산 규모는 1조9434억 원에 달한다. 1년 전(7175억 원)보다 총자산 규모가 2.7배로 불었다.

미 국채를 기초자산으로 삼고, 콜 옵션(정해진 가격에 살 수 있는 권리)을 매도해 추가 프리미엄을 누릴 수 있는 ‘커버드콜’ ETF의 성장은 더욱 두드러진다. 지난해 2월 상장한 미래에셋자산운용의 ‘TIGER 미국30년국채커버드콜액티브(H)’는 총자산이 111배, 4월 상장한 삼성자산운용의 ‘KODEX 미국30년국채타겟커버드콜(합성 H)’은 총자산이 35배나 늘었다.

● 컴백한 트럼프 여파로 수익률 꺾여

다만 미국 장기채 ETF들의 수익률이 인기를 따라가지는 못하는 양상이다. ACE 미국30년국채의 5일 종가는 1년 전보다 9.4% 하락했다. TIGER 미국30년국채커버드콜은 상장했을 때보다 15.1% 하락했고, KODEX 미국30년국채타겟커버드콜도 상장 10개월 만에 8.4% 빠졌다. 다만 투자가 쉬운 ETF 대신 미 국채에 직접 투자한 투자자들의 경우 1300원대였던 원-달러 환율이 1400원대 중후반으로 상승한 덕에 환차익으로 채권 손실을 만회할 수 있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한 지난해 11월 이후 수익률 하락세가 두드러진다. 미국 대선이 치러진 지난해 11월 5일(현지 시간) 4.280%였던 미 국채 10년물 금리는 이튿날 트럼프 대통령의 승리가 확정되자 4.431%로 15bp(100bp는 1%포인트) 이상 뛰었다.

이후 연준이 금리 인하에 나서며 상승세가 주춤했던 채권 금리는 지난해 12월 초부터 다시 뛰기 시작해 취임 직전까지 또 치솟기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6일 4.148%였던 미 국채 10년물 금리가 지난달 14일에는 4.792%로 40여 일 만에 약 64bp나 올랐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도 하기 전부터 금리가 뛴 것은 보호무역주의가 불러올 인플레이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을 상대로 흑자를 보는 국가들에 관세를 부과하겠다며, 관세를 부담하지 않으려면 미국 내 공장에서 생산할 것을 요구해 왔다. 단기적으로 관세는 물가 상승 압력으로 작용한다. 미 정부가 부과한 관세가 전적 혹은 부분적으로 미국이 수입하는 제품과 상품 가격에 반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트럼프 대통령은 불법 이민자에게 강경한 태도를 보여왔는데 불법 이민자를 추방하면 기업이 이들을 대체할 노동력을 새로 채용하는 과정에서 인건비 부담이 커지고 이것도 물가 상승을 부추긴다.

물가가 안정되지 않는다면 연준은 기준금리를 내리기 힘들어지고, 물가 상승이 관리 가능한 수준을 벗어난다면 오히려 금리를 올려야 할 수도 있다. 기준금리가 오르면 신규 채권보다 낮은 금리로 발행된 기존 채권의 가격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인플레이션이 채권 투자자들에게 위협적인 이유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전 고점을 찍은 뒤 다소 누그러든 장기채 금리가 이달 들어 다시 요동치고 있다. 우려대로 관세 전쟁이 현실화됐기 때문이다. 1일 트럼프 대통령이 캐나다와 멕시코에 25%(캐나다 에너지 제품은 10%) 관세, 중국에 10%의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힌 여파로 미 국채 10년물 금리는 4.5%대가 유지되고 있다. 국경 관리 강화 등을 약속한 캐나다와 멕시코를 대상으로 한 관세 부과를 30일가량 유예하기는 했지만, 속을 알기 힘든 트럼프 대통령인 만큼 채권 시장의 변동성도 커진 상황이다.

● ‘트럼프 1기’ 때도 채권 금리 들썩

들썩이는 채권 시장은 트럼프 1기 당시를 연상시킨다. 2016년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처음 대선에서 승리했을 때도 채권 금리가 뛰기 시작했다. 11월 9일 2.068%였던 미 국채 10년물 금리는 20여 일 만인 12월 1일 2.454%까지 약 38bp나 올랐다. 이듬해 1월 트럼프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하자 금리는 재차 상승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약속했던 대규모 감세와 인프라 투자 계획에 따른 경기 부양 효과와 함께 물가 상승 우려가 커진 영향이다.

2018년 3월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산 제품에 관세를 부과하는 행정각서에 서명하며 본격적인 미중 무역분쟁이 시작됐다. 2018년 7월 미국과 중국은 상호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부과했고 미 국채 10년물 금리는 2.8%대에서 8월 초 3%까지 상승했다. 이후 등락을 반복하던 10년물 금리는 9월 중순부터 11월까지 3%대를 유지했다. 2018년 말부터는 무역분쟁 심화에 따른 경기침체 우려가 높아지며 미 국채 10년물 금리가 하락세로 전환됐다.

● 강달러·금리 인하 국면 등 다르지만 변동성은 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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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 부과로 인한 물가 상승에 대한 공포가 금리를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트럼프 1기와 2기는 비슷해 보이지만 대외적인 환경에서 차이가 있다. 트럼프 1기 당시엔 연준이 2017년 3차례, 2018년 4차례에 걸쳐 금리를 인상한 상승 국면이었던 반면 현재는 연준이 금리를 내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 약(弱)달러였던 트럼프 1기와 달리 현재는 강(强)달러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트럼프 2기의 관세 정책이 1기보다 더 광범위하고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도 다르다. 중국뿐만 아니라, 비록 유예를 주었을지라도 캐나다, 멕시코 등 우방국도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강인수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는 “트럼프 2기는 1기 때 미진했던 부분을 보완해 ‘관세로 원하는 것을 얻어내겠다’는 입장이 확고해 보인다”며 “올해 안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려는 조바심을 낸다면 달러 강세가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연준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과거 트럼프 대통령은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보다 더 큰 우리의 적”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등 연준의 기준금리 결정에 개입하려 했다. 반면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초대 재무부 수장인 스콧 베센트 장관은 “연준의 기준금리가 아닌 만기채 10년 금리가 주 관심사”라며 “연준에 금리 인하를 촉구하는 게 아니다”라고 발언하는 등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다.

시장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의 여파로 횟수는 달라질 수 있으나 결국 기준금리 인하 방향 자체는 확실하다고 본다. 기준금리가 아닌 시장금리를 표적으로 삼은 트럼프 행정부의 달라진 반응도 미 국채에 긍정적인 요소다. 재정적자 비중을 3%까지 낮추겠다는 트럼프 행정부가 이자 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해 국채 발행 금리를 선제적으로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기업들의 가격 경쟁력 제고 차원에서 미국 정부가 약달러를 유도하고 나선다면 투자자의 수익률에는 영향을 줄 수 있다. 또 변동성이 큰 상황에서 투자자들은 단기채와 장기채 투자가 갖는 의미를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채권의 만기가 길수록 금리 변화에 따른 수익률 변동이 크다. 박 삼성증권 채권상품팀장은 “미국 채권 투자 수익률에는 원-달러 환율과 금리 변동이 영향을 주는데 단기채는 환율 변동 영향이 더 크고, 장기채는 금리 변동이 주는 영향이 더 크다”며 “글로벌 경기 상황 변화에 따라 그에 맞는 투자를 선택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홍석호 기자 wil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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